<경제사>

Book 2019. 7. 9. 01:07

예전 학부시절 들었던 강의의 교재로 사용했었던 교과서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벌써 15년 넘는 일인데 그동안 단 한번도 다시 읽지 않았다. 다시 읽는데 정말 처음보는 내용같았다. 사람은 역시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내용을 숙지하고 체내화하기 위해서는 반복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또한 이 무한한 지식을 모두 체내화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계속 읽어가고 다만 아이디어를 첨가하여 자신만의 지식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보고 느꼈다.

<경제사>라고 하면 어쩌면 자본주의의 역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에도 경제는 있었다. 지금처럼 자본이 세상의 원리가 된 것은 인류의 역사상 최근의 일이지만 그 전에도 경제는 우리 삶에 중요한 축으로 역할을 해왔다.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제를 바라보는 사관을 우선 이야기하고 그 후 고대생산양식부터 중세봉건시대, 중상주의의 발전, 자본주의 도약, 산업혁명 그리고 대공황까지의 일을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교과서적으로 설명했다.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우리가 지금 평범하게 쓰고 있는 단어의 역사적 어원을 알 수 있어서 이다. 우리가 쓰는 여러 단어는 들은 각기 역사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라는 단어는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의 경우 양모수출을 목적으로 한 상인조합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차 직물업이 발달하여 상인이 모직물공업질르 흡수하여 객주제 가내공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인들이 조합을 만들 었는데 라이버리 컴페니(Livery company)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조직이 현대 회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읽으면서 흥미롭게 본 부분은 영국의 융성과 쇠퇴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 답게 영국은 19세기 지구의 최강자였다. 각종 산업에서 선두를 달렸다. 예를 들어, 1878년 화학공업 46%의 비중이 영국 몫이었고, 면업의 경우에도 183469% 등등 1820년에는 세계 공업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우선 영국의 위상이 정말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맞을 정도였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브렉시트로 난항을 겪고 있는 유럽의 한나라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국가였음을 실감케하는 생산량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치를 도대체 어떻게 구했냐는 것이다. 지금이야 세계은행이나 OECD같은 국제기구에서 객관적인 수치를 구하는 노력을 하고 있고 이는 국제적으로도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의 생산량 같은 것은 어떻게 측정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을 하는 것이 역사학자가 하는 일이기는 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예전 역사적인 자료가 미비한 상태에서 어떻게 영국의 생산량이 세계의 50%가 되게 되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생경한 단어들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이란 나폴레옹 3세 하의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브르조아와 프로레타리아의 세력이 균형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중간적인 소시민적 사회층을 기반으로 독재적인 국가권력이 성립된 상태라고 한다(200). 요맨(yeoman)이라는 개념도 있다. 잰틀맨(gentelman)과 허즈밴드(husband: 농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신분이라고 한다. 요맨이라는 개념자체라는 것도 놀랍지만 허즈밴드가 남편이 아니라 농민의 뜻도 있다는데 놀랐다. 물론 몰라도 사는데 지장은 하나도 없다. 알아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물론 경제의 역사를 배운다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중무역전쟁이나 일본의 무역조치에 직접적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배워 지금을 살아가는 혜안을 얻을 수 있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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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속의 작은 유럽 칭다오>

Book 2019. 7. 8. 02:33

시중에는 많은 여행기가 있다. 같은 여행지라도 간 사람마다 다른 식의 여행기를 쓴다. 그것이 여행기의 참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유명 여행지에 대한 수많은 여행기가 있더라도 또다른 여행기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기는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 그것이 여행기의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작은 유럽 칭다오>가 특별했던 것은 칭다오 때문이 아니라(이미 칭다오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이 출판되어있다) 글쓴이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두 명의 아이가 같이 쓴 것이다(오히려 특이하게 어머니는 글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선 아버지가 큰 틀에서 들을 써나가고 아이 2명이 덧붙이는 스타일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용이 매우 진솔하다.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글로서 짧고 느낌위주로 썼다. 그렇다고 지적할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으로서 자기가 느낀 점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기를 쓰고 그것을 책으로 엮는다고 하면 엄청난 퀄리티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엄청난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이야 말로 글을 멀리하게 하는 가장 큰 추동력이 될 수 있다. 물론 오히려 글을 쓴 초등학생 당사자가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부끄러워할 수도 있겠다. 혹은 어렸을 적에 썼던 글을 보면서 회상에 잠길 수도 있겠다. 그 반응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자신의 감정을 글로서 담아낸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중국의 작은 유럽 칭다오>4명의 가족이 칭다오에 7일간 있었던 일을 쓴 것이다. 이 책은 시중에 나와있는 가이드북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여행기를 보고 장소에 대한 정보를 얻는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최근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칭다오를 책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최근에 칭다오에 다녀온 블로그를 통해서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정보제공으로서의 기능은 취약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은 2014년에 출간되었는데 롯데마트에 간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롯데마트는 사드문제로 인하여 폐쇄되고 지금은 없다. 게다가 칭다오의 여러군데를 들렀지만 관광 포인트를 많이 놓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을 만하다. 1주일간 칭다오에 갔었던 이야기를 가감없이 썼는데, 일반인으로서 여행가는 것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포인트가 많다. 예를 들어, 택시에서 담배냄새가 난다든지 혹은 생각보다 훨씬 세련되었다든지 하는 느낌은 칭다오가 간 한국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분량이 길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30분 정도 집중하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내용이 어렵지도 않고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가독성도 좋다. 그 사진도 매우 인간적이다. 근래 카메라 질이 워낙 좋아지고 사진찍는 기술도 일반인들도 상당히 늘었기 때문에 작가같은 느낌이 들게 찍게 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정말 평범하게 찍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더 정감이 갔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처음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지는 모르겠다. 이 칭다오 여행기 책은 첫 여행기책이 아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작업에 대한 로망이 있다. 특히 아내와 같이 했던 시간을 글과 찍었던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책이 많이 팔리면 그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글을 쓰다보면 아무래도 독자에게 생각과 생활을 들키는 느낌이 당연히 드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면 그 또한 스트레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수의 사람과 우리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처음 시작하는 용기도 중요하고, 글을 어느 정도 쓰는 노력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난 날을 정리하고 추억할 수 있는 저작물을 쓴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소중한 과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여행기의 참의미가 아닐 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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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천재들>

Book 2019. 7. 6. 00:41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살면서 여러 고민이 생길 때면 역사책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라는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신화가 된 천재들>이라는 책에서는 우리나라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 이다. 저자가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문인의 작품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서술했지만 나같이 문학에 문외한은 오히려 각 작가들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의 호, 해운(해운대의 해운)으로 유명한 최치원의 삶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800년대 중후반 신라사람으로서 당나라에 가서 무려 17년을 산다. 지금도 해외에서 17년을 살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의미하는데 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17년을 산 최치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이야 해외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국내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고, 방송도 볼 수 있었어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최치원 선생께서 당나라에 간 시절에는 고국에 왔다갔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 데다가 소식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2살의 나이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물론 그 당시 12세는 평균수명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짧으므로 지금 어린이 취급을 받는 12세와는 다른 사회적인 위치를 점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톡도 없는 시절에 초등학교 나이에 중국으로 넘어가서 학문을 정진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최치원선생님은 여러 시를 통해 자신의 어려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워낙 오래전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그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렇게 행복하고 잘 나가는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28살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와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하지만 지방을 전전하면서 공무원 생활을 한 것 같다. 일단 최치원이 진골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고, 글문장 실력과 정치능력은 달라서 그럴 수도 있다. 또한 중앙정부의 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지방정부의 일을 더 좋아해서 럴 수도 있다. 추측해보면서 능력이 출중하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치원 선생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책에는 17명의 문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최치원, 김시습, 허균, 황진이, 김만중, 이규보, 정약용, 박지원은 그 분들의 저작을 읽지못했어도 존함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임제, 권필, 소세양, 유희경, 임춘, 신광한, 정사룡, 이언적, 이옥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본 이름의 이 분들도 걸출한 문장을 선보인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인생을 독자적으로 살아갔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이 사람들도 후세에 같은 땅에 살고 있는 평범한 나에게 조차 이름조차 모를 정도라면, 인생사는 것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만 몇 백년 후에는 기억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고조할아버지 이상의 나의 조상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존함조차 모른다. 상황이 이럴 진데, 너무 얽매이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허망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걸어볼 만한 것은 글의 힘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원작자가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내가 쓰는 논문들은 어떻게든 남을 것이다. 추후에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그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 이런 사람도 그 당시에 존재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것이 글을 쓰는 여러 가지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글은 이름을 남기기 아주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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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lliver's travels>

Book 2019. 7. 5. 01:10

걸리버 여행기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소설책이다. 그런데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고 유년시절 보았던 걸리버 여행기 그림이 생각날 뿐이다. 특히 소인국에 가서 거인으로서 잡혀서 해변가에 누워있는 걸리버가 인상 깊었다. 기회가 되어서 걸리버 여행기를 원전으로 읽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림처럼 잘 와닿지 않았다. 우선 영어로 소설을 읽는 것, 특히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한 소설을 읽는 건 단순한 영어실력 이상이 있어야 한다. 아예 내가 일전에 읽었던 <I, Robot>처럼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으면 오히려 이해가 쉽다. 그런데 영상물을 보지 않고 소설책을 읽는 것은 상당한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제대로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1667년에 태어나 1745년에 생을 마감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당시 영국정치상황을 풍자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읽는 내가 17세기 18세기 영국 정치상황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걸리버 여행기 본 소설 앞에 친절하게 해설도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잘 와닿지 않았다. 아마도 영국인이 이 소설을 읽거나 영국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읽었더라면 어떠한 포인트에서 영국정치 및 사회를 풍자했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점은 작가의 창의성이다. 물론 실제 세상을 빗대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여러 등장민족 및 국가는 색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독창성은 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야후(Yahoo)이다. 지금은 그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했으나 구글(google)이 인터넷을 제패하기 전의 검색엔진의 터줏대감은 단연코 야후였다. 이 야후는 걸리버에 나오는 종족 중 하나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 천공의 성 라퓨타도 걸리버에 나오는 지역이름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글을 쓸 때는 이렇게 명칭이 이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작은 영원히 남아 후세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걸리버 여행기가 기본적으로 소설이지만 실제를 모티브로 한만큼 몇몇 지명은 실제가 나온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일본(Japan)이 나온 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일본은 가상의 명칭도 아니고 실제의 당시 일본을 잘 반영해서 나온다. 일본의 수도가 에도로 나오고, 걸리버가 스스로를 네델란드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이 네델란드 사람과 교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사람과는 달리 네델란드 사람에게는 조금 관대한 이유도 있었다. 이런 점은 18세기 초의 서양사람들이 이미 일본을 알았었다는 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지금이야 세계 각국의 상황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300년 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마치 소설책에 나오는 여러 나라들처럼 생경하고 호기심찬 상상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렸을 때, 흥미롭게 걸리버 여행기를 보았었던 것 만큼 재미있게 소설책을 읽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는 나의 소설 읽는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소설이 지어진 시대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이 아마도 영상물일 것이다. 물론 원전이 글로 써있는 것은 중요한 일일 태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글로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글의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도일 것이다. 문제는 형식이 바뀌면서 전하는 내용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화영화로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서 영국사회를 어떻게 풍자했는지 가늠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내용조차 창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나쁜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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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저널리즘>

Book 2019. 7. 3. 16:42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1세기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언론은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이하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연구서인 <디지털 미디어시대의 저널리즘>에서는 변화한 언론상황,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디지털 시대의 저널리즘에 있어서 새로운 장점은 파워블로거라는 전문가들의 등장이다. 예전에는 기자 직함을 단 사람만이 글을 쓰고 보도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일반인들이 웹에 글을 쓰고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파워블로거와 기자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책에 따르면(84) 첫째, 뉴스에 대한 전문성이냐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냐의 차이이다. 물론 분야에 맞는 전문기자도 있지만 기자는 어쩌면 아무 분야에도 전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전문적인 분야가 있다면 보도분야에 전문성이 있을 것이다. 기자는 그 어떤 내용이라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전문가이다. 반면에 파워블로거는 내용을 알리는데는 어수룩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를 깊이있게 이야기하는데는 능숙하다. 그래서 표준화된 기자의 보도내용과는 다른 독특한 글의 풍미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둘째, 취재원과의 접근성이 다르다. 파워블로거가 취재를 하려면 매우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취재를 받는 입장에서는 공신력이 떨어지는 개인에게 정보를 내놓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반면에 언론기자들은 기관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셋째는 신뢰성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기자는 언론기관의 이름을 걸고 보도한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기자가 더욱 신중히 사실만을 보도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신뢰가 최근에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실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기관의 이름을 걸고 이야기하는 기자와 자신의 이름만으로 이야기하는 파워블로거와의 사이에는 신뢰성의 차이가 있다. 넷째는 객관성 담보여부이다. 보도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불편부당하게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파워블로거의 경우에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사실을 자신만의 해석을 넣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다섯 번째 차이점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데 방송사의 보도사이에는 차이가 크지 않은 데 반해서 파워블로거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 물론 기자나 방송사 사이에도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파워블로거 사이의 차이보다는 훨씬 적다. 이러한 차이점이 좋고 나쁜 점 모두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기자가 되었든 파워블로서가 되었든 사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형식에 맞게 글을 쓰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다양함을 늘려준다는 점에서 일조한다고 생각하고 이 둘이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널리스트는 무엇인가? 이 책에 따르면 신문이 등장하기 전의 저널리즘이란 사적 간행물을 적는 행위를 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문이 등장하고 뉴스를 수집하는 사람으로 의미가 전환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저널리스트라는 역할이 정립된 것이 1800년대가 넘어서 였다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저널리스트가 생겨난지가 불과 200년 남짓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텔레비전이 없었으므로 신문기자를 뜻했었다. 그러다가 매체의 발달로 종이신문에서 국한된 언론이 라디오로도 퍼져나가고 그리고 20세기가 되어서는 텔레비전의 시대가 왔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언론 그리고 저널리스트의 경계는 확대되면서 동시에 불분명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인위적으로 막기도 어려운 흐름이다. 문제는 이 흐름에도 정확히 사실을 전달하는 자세를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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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세대: 그들의 역습이 시작됐다>

Book 2019. 7. 2. 19:47

 

우리나라 청년들이 신음하고 있다. 경제성장이 크게 늘던 시절이 끝나고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청년들이 희망을 보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지도 이제 20년이 가까워졌다. 특별한 해결책은 찾기 어렵고 정부에서는 여러 정책을 실행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이케아 세대>는 저성장 시대의 청년의 고민을 깔끔하게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이케아 세대1978년 전후 7~8년생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케아(Ikea)와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데 수긍이 간다. 우선 저렴한 가격이다. 물가는 많이 올랐는데 연봉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물론 잘 나가는 소수의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케아는 꽤나 멋있는 디자인을 갖춘 가구이다. 이케아 세대의 스펙은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고학력에 자격증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케아는 가성비가 좋다. 능력은 잘 갖추어져 있는데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세대의 스펙이라면 꽤나 안정된 직장을 다녀야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미완성 제품이다. 아직 현재 30대는 삶의 중간단계를 지나고 있다. 단기적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대개 이케아 가구를 살 때는 영구적으로 사용할 비싼 가구를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쓸만한 가구로 주로 이케아를 선택한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몇 년동안의 세월에 쓸만한 가구로 이케아는 제격이다. 이케아 세대는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물론 현재 30대가 가지고 있는 상황을 이케아에 껴맞추는 것이 억지스러운 점도 있으나 꽤나 괜찮은 설명이다. 게다가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케아 가구에 스웨덴의 스칸디나비아 스탈 가구에 호감을 보이는 점도 더 이케아 세대라는 단어를 어울리게 한다.

저자의 글 내용에 대부분 동의를 하면서 읽었다. 다만 저출산이 가져올 파국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저출산이 생산가능인구를 줄여서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저자뿐만 아니라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통념이다. 나는 이 생각이 지금까지의 사회나 앞으로 몇 년간의 사회에는 맞는 생각이라고 본다. 하지만 길게 보면 저출산에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정도는 미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노동력, 특히 양적인 의미에서의 노동력이 경제에 미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양으로 밀어 넣어서 생산물을 산출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예전에 수십명에 사람들이 막대한 시간을 들여야 할 작업들을 짧은 시간 안에 로봇들이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반 노동력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소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 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인구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생산의 입장에서는 예전만큼의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출산이 꼭 나쁜 것이 아닌 것이 사람이 많이 없어야 사람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청년들이 구직난에 시달리는 간단한 이유는 좋은 일자리는 적은데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물론 베이비부머때보다는 출생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 현재 30대 때의 사람은 많다. 한 해당 20만명 정도만 적었다면 지금같은 구직난은 없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경제는 수요와 공급으로 돌아가고 노동시장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만약에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으면, 경제성장률이 높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고난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차라리 저출산으로 사람이 귀해지면 근로자 한명 한명 대접받고 인간받게 일할 수 있는 날들이 올 수 있다. 물론 국가가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결혼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외의 개인적인 가치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까지 출산을 독려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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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

Book 2019. 7. 2. 00:16

막스 베버(Max Weber)는 사회과학계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다. 사회학부터 행정학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의 여러 저작이 있지만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학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즈음 읽어볼 만한 글이다. 이 책은 막스 베버가 쓴 글은 아니고 1917년 독일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 <Wissenschaft als Beruf>를 글로 옮긴 것이다.

강의는 미국과 독일의 교수시스템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지금이야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인하여 세계의 곳곳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막스베버가 살았던 시기에 어떻게 베버교수는 미국의 교육상황을 그렇게 잘 알고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베버가 살았던 시기에 독일에서 미국을 가려면 배를 타고 몇 주를 거쳐야 미국에 당도할 수 있었을 탠데 독일에 살면서 미국이야기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신기했던 것은 그 당시에도 이미 미국이 하는 방향으로 교육제도가 변하고 있음을 막스 베버는 이야기한다. (“학문의 폭넓은 분야에서 대학제도의 최근 발전이 미국 제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대륙의 강대국이 큰소리를 내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미 1900년대 초반에 대학교육을 미국이 선도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경쟁에 있어서 앞서가기 시작한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석 위에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투톱으로 올라서고 공산권이 무너진 이후에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의 일인자가 된다.

이외 에는 강연주제가 직업으로서의학문이기 때문에 교수가 되고 업으로서의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무려 100년전 이야기이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대학의 어떤 교수도 자기가 임명될 때 벌어졌던 토론에 대해서 회상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개 박사학위를 받고 채용시장이 나서게 된다. 그 때 시연강연을 하고 자신의 연구를 기존의 교수 앞에서 발표하게 된다. 이 때 면접관인 교수들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는 한다. 그 때 받은 질문을 진땀을 흘려가며 대답해야 한다. 어수룩한 대답은 곧 채용이 안될 수 있음을 알기에 질문을 받은 후 짧은 시간 동안 훌륭한 대답을 해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잡톡(Job talk)에서의 경험이 유쾌한 경우는 많지 않게 된다. 이런 점은 100년 전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듯하다.

그리고 베버교수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교육자로서 해야할 일을 이야기한다. “유능한 교수라면,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학생들에게 불쾌한 사실들-즉 그의 당파적인 견해에 비추어볼 때, 불쾌한 그런 사실들을 나는 말합니다-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말 말처럼 쉽지 않다. 대학에 들어올 정도로 나이가 먹게 되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가진 생각과 지식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과 정보가 잘못되었을 경우이다. 대학교수로서 학생의 잘못된 정보를 고쳐주는 일은 하나의 책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강압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토론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교육자는 학생들이 깨달음을 얻게할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한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갑자기 새로운 알거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도 할 법한 고민거리를 100년 전에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앞으로 100년 후에도 인류가 로봇에 의해 사멸되지 않는 한 하고 있을 것이다. 연구를 업으로 삼을 사람이라면 부담없이(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한번 즈음 읽어볼 만한 책이다. 특히 학생보다는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학자가 보면 공감할 거리가 많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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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obot>

Book 2019. 6. 30. 21:34

이제 <원더키드 2020>의 시대가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 예전 공상과학영화에서 그렸던 미래의 모습이 모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꽤나 많은 면에서 오늘의 모습은 예전에 그렸던 미래와 닮아 있다. 그 중 하나가 로봇의 발전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인류는 꾸준히 기계에 의존해왔다. 처음에는 단순육체업무를 처리해주는 수준이었다가 컴퓨터의 개발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지능적인 면에서도 기계에 못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지능적인 면에서도 점차 발전하여 이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2016년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전에서 천재 이세돌이 간신히 한번 이긴 것은 어떠한 사람에게는 안도의 한숨이었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이제 인간의 시대는 갔음을 울리는 종소리였다.

SF소설의 기반을 닦은 Issac Asimov<I, Robot>을 통해서 인간보다 우월해진 기계의 시대를 그렸다. 21세기가 된 지금이야 로봇의 뛰어남을 여러 방면에서 느끼고 있지만 아시모브가 왕성하게 작업하던 시절에는 아직 로봇, 특히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시대를 그리기는 어려웠다. 인공지능의 로봇이 활동하는 시기를 그린 소설을 1950년에 써낸 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운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워낙 그가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가끔은 그가 그린 미래대로 우리가 점점 닮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닐 까하는 의심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아시모브가 제시한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로봇 원리의 3법칙이다. 로봇이 지켜야 할 수칙으로 지금까지도 인공지능 로봇에 지침이 되고 있는 중요한 원리이다.

A robo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A robot must obey the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s.

 

이 법칙은 일단 완벽해 보인다. 이 법칙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을 위해서 살고, 인간은 기계 덕분에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문제는 이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이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은 로봇이 인간을 위한 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다. 기계가 인간을 이러저리 고려해도 자신보다 나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인간을 위해 살지 궁금하다. 물론 로봇을 만들 때 인간을 위해 살라고 프로그램시키면 되지 않을까하는데, 고등로봇은 이 조차도 쉽게 바꿀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된다. 인간이 고등로봇을 만들 때 인간을 위한다는 위의 법칙을 관철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보다보녀 흥미로운 개념도 마주치게 되는 데 그 중 하나가 로봇심리학자(Robopsychologist)이다. 로봇이라고 함은 자고로 감정이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 포장기계에는 감정이 없다. 그런데 점차 기계가 발전해서 인간과 같은 지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쩌면 마음이라는 것도 가질 수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을 꼭 가지지 않더라도 로봇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로봇심리학자는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신종직이 될 것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사회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로봇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발전된 로봇에게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생각도 해야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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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쓰는 목민심서>

Book 2019. 6. 3. 11:28

남양주에 있는 실학박물관에 갔다가 정약용선생님의 명저인 목민심서이 축약으로 되어 있는 책을 보고 구입하게 되었다. 목민심서는 1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편은 부임(赴任), 2편은 율기(律己), 3편은 봉공(奉公), 4편은 애민(愛民), 5편은 이전(吏典), 6편은 호전(戶典), 7편은 예전(禮典), 8편은 병전(兵典), 9편은 형전(刑典), 10편은 공전(工典), 11편은 진황(賑荒), 12편은 해관(解官)이다. 정부운영에 있어서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부분에 대해서 정약용선생님은 정부관리가 해야할 일들을 적어놓았다. 물론 정약용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과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분이 정부 그리고 정부관리들이 해야할 일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만약에 정약용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꾸준히 지켰다면 지금 정부의 문제는 반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목민심서를 보면 주옥같은 글귀로 가득하다. 관직에 임용되었을 때부터 퇴임할 때까지 바람직한 공직자의 모습을 써놓았다. 부임할 때 행장은 옛 것을 사용하라 말씀하셨다. 그만큼 절약과 검소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직자들이 자기 돈이 아니라고 혈세를 펑펑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만큼 작은 용품을 쓸 때도 아껴서 사용해야한다.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이전(吏典) 부분에서의 찰물(察物)이다. 찰물이라는 것은 물정을 잘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정약용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목민관은 외롭게 고립되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목민관을 속이려 하는 자들이라고 보았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는 지역사정에 어둡기 마련이다. 야박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생각된다. 자칫잘못하면 지역유지와 결탁하여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환기시킨 것이다.

목민심서를 읽다보면 단순히 출중한 공직자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모습을 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약용선생님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금천군 산속에 도적이 50여명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부터 자기 이야기는 아니지만 들은 이야기로 최윤덕이 태안군수로 있을 때 화살통 장식 쇠붙이가 떨어져나가서 고친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시대에 어떠한 일이 있었을지 가늠해볼 수 있다.

정약용 선생님의 격언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기본교육만 받더라도 다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마도 공무원을 하는 사람의 지적 수준이라면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을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무원이 정약용선생님의 말씀처럼 행동하게 하느냐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공무원들이 철저하게 행동가짐을 한다면 최선일 것이다. 문제는 소수의 공무원들의 행동거지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패한 소수가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으면 그 부패는 점점 번져서 하나의 공무원 문화가 된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은 공무원하면 치를 떨게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물론 정약용선생님의 말씀하신 기본도 중요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원리를 현실을 적용하느냐도 중요하다. 문제있는 공무원을 단죄하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일전에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게리 베커선생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범죄가 잡힐 확률과 처벌강도와 역비례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행실이 부실한 공무원을 단속을 강화하고 잡힐 경우에 그 처벌강도도 높게 해야 할 것이다.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공직이라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벌려고 혹은 직업 안정성이 좋아서 공직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공직이라는 것은 까다롭게 해야한다. 그것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선생님이 돌아가신지 이제 거의 200년이 다되어간다. 공직자들의 행태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가 염원하는 공직자는 아직 많지 않다. 앞으로 좋은 쪽으로 변화가 있어서 정말 좋은 공직자들로 가득찬 정부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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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

Book 2019. 5. 28. 15:59

경제학은 이 자본주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을 꺼리는 이유는 아마도 수식 때문일 것이다. 각종 수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경제학에 아예 입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를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일단 경제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수식을 단 하나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경제학자(책에서 나오는 밀같은 경우는 경제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들의 생각의 중점을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책 제목처럼 예전 사람이라고 그들의 생각이 고루하거나 지금은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현재의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재미있는 점은 경제학자들의 경제논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사생활이 그들이 말하는 경제사상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계속 경제학 이야기만 하면 분명히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진다. 아담 스미스, 토머스 멜서스, 데이빗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알프레드 마샬, 존 메이너드 케인즈, 제임스 뷰케넌, 소스타인 베블렌 등 굵직굵직한 거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본적으로 이 거물들은 추보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기본의 사상가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간다. 이렇게 내용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전반적으로 그동안 경제학(특히 주류경제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현재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중 무역전쟁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막대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중국산 제품에 대한 높은 세율을 매겨서 해소하려고 한다. 이에 중국도 미국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기려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련된 많은 업체들이 일희일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American First”를 외치며 미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무역을 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상대 국가에서 가만히 앉아서 이를 지켜만 보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중국처럼 반발을 할 것이다. 중국에서 미국에게 보복관세를 물리면 중국에 수출하는 미국기업도 손해를 보게 된다. 게다가 요즈음 같은 국제화된 경제사회에서는 한 제품을 만들더라도 부품은 다른 나라의 것을 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중국 화웨이 핸드폰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 부품도 들어가지만 미국산 부품도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화웨이를 막으면 중국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미국에게도 피해가 간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무역전쟁 촉발은 단기간에는 이익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보호무역적인 태도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불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갑자기 관세를 올릴 수도 있는 상대라고 생각한다면 미국과의 무역량을 늘리기 보다는 다른 국가과 무역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소비자들도 더 좋고 싼 물품을 이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으로 소비자의 후생은 적어질 수 있다. 문제는 관세를 올려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국한되어 있는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널리 퍼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 소수가 정치권에 로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반면에 소비자들은 조금씩 손해를 보기 때문에 특별히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유무역의 선봉장이라고 불리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가차없이 자유무역원리를 깨버리는 데에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불공정 무역거래는 시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역적자가 크다는 이유로 무작정 관세를 올려버리는 행위는 문제가 있다. 아마 리카도가 이 모습을 본다면 아직도 사람들이 배우지 못했구나하며 한탄할 수도 있겠다. 물론 당장 관세를 올려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언발에 오줌누기 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자유무역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는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초적인 경쟁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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