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Book 2019. 1. 27. 23:12

알베르 카뮈의 명저 <이방인>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거의 17년 만에 읽었는데 너무 화창해서 살인을 했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처음 읽는 느낌이었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17년 전에 읽은 후에 어떠한 감정인지도 잊어버렸다. 이번에 읽고 또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조금 해두어야 겠다.


기본적으로 <이방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인 뫼르소(Meursault)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이기까지가 1부이고 2부는 체포된 후에 사형선고를 받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나는 이번에 <이방인>을 읽을 때 두가지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의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코 패스가 된 뫼르소의 모습이다.


<이방인>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특이한 점은 뫼르소가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지극히 반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나는 부모님의 사망을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너무 나도 슬픈 일이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과정을 일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나의 모습도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평상심을 가지고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다

<이방인>에서는 뫼르소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자세하게 나와있지는 않다. 그래서 섣불리 그의 감정상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한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그는 현실을 아예 외면해버린 것이 아닌가싶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받아들이기 싶지 않아서 현실을 회피해버리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갑자기 이점이 부각되어서 다가왔는데 갑자기 부모님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인상깊게 다가온 점은 뫼르소가 싸이코 패스라는 점이다. 1942년에는 싸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뫼르소가 싸이코 패스라고 말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는 싸이코 패스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남의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기껏따가운 햇살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으니 말이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에게 4발을 더 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 과연 뫼르소가 살인이라는 행동을 꼭 해야했느냐는 둘째치고 그의 살인 후의 감정상태는 더욱 가관이다. 살해당한 사람에 대한 연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처연히 관조하는 태도를 취한다. 굳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변명거리로는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에 의하여 크게 정신상태가 나간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잃고 사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살인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자살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이 행동과 생각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물론 어떠한 생각을 하든 행동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침해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나는 사는 것이 힘들다는 점에서는 크게 동의한다. 불교에서 생즉고(生卽苦)라는 말이 있다고 하듯이 사는 것은 어쩌면 고통의 연속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점점 그 강도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도피의 안식처를 찾기도 한다. 예를 들어, 꽤 많은 남자들이 경우에는 게임을 선택하기도 한다. 나는 이 게임이 상당히 순기능을 한다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되지만 게임에서는 여러 가지로 다른 성취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현실세계의 근심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도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읽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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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slee

<시지프의 신화>

Book 2018. 12. 25. 02:00




부조리전문가라고 불러도 좋을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부조리를 설명한다. 카뮈가 부조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시지프 신화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조리라는 개념이 워낙 난해해서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는 데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 시지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부조리에 대한 체감도가 확연히 높아진다.


잘 알려진 대로 시지프는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이 내려졌다. 시지프가 열심히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불행하게도 그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래서 시지프는 또다시 내려가서 그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옮겨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무한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노력이 결실을 이룰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보면 마치 현재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working poor)나 평생 노력해도 아파트하나 제대로 장만할 수 없는 청년들이 생각이 난다. 이는 개인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부조리가 있는 것이다.


더욱 더 문제가 비극적인 것은 카뮈가 썼듯이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바위를 올리는 루틴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하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식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은 한순간 한순간이 고욕이다. 그렇다고 이 구조적인 부조리를 극복하기에는 개인의 힘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시지프가 신들을 대항하여 바위를 옮기지 않고 태업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예전에 조선시대 때 노비는 자신의 처지를 많이 비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누구나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현실의 무게는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이럴 때 사람들은 좌절하고 슬픔에 처한다. 문제는 현재 사회구조는 쉽게 개인이 무거운 일상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느 정도 가난한 현대인들은 시지프와 닮아있다.


이러한 부조리를 타개하지 못하고 현실에 메어있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일상의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담배나 술은 건강을 해치고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이는 먹어가고 현실을 더욱 더 어두워진다. 그러면서 부조리에 처한 개인은 카뮈가 말한 한가지 질문에 당면하게 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개인은 자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평균적으로 하루에도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그들이 소중한 삶을 스스로 마감짓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개인이 느끼는 부조리일 것이다. 아무리 살아도 바뀌지 않은 세상에 차라리 살기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는 카뮈가 부조리에 대하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끝이 난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광물적 광채 하나 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해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카뮈의 마지막 말은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쉽게 변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현실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이 바뀔 때까지 지금하는 일을 매우 성실히 하는 것이다. 이는 이 형벌을 내린 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시지프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카뮈의 해결책에는 전반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개인적인 부조리한 일에는 나름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에 사회적인 부조리하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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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slee

<작가수첩 1>

Book 2018. 7. 15. 02:52



<작가수첩 1>이라는 책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원래 책이름이 작가수첩은 아니고 <이방인>, <페스트>로 유명한 작가 알베르 카뮈의 수첩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수첩의 질감이 살아있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내용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가의 생각뿐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첩을 통해서 시대상을 알 수 있었다. 기록된 날짜가 1930년 말이 되면 나치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폴란드를 침공한다. 이에 대해 카뮈 역시 생각하고 고뇌한다. 이런 점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명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는 말을 한 사람은 무심코 했는데, 나중에 꽤 의미있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말을 한 사람이 유명하면 명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작가수첩에는 여러 귀담아 들어둘만한 명언들이 즐비하다. "경험이라는 말의 헛됨. 경험은 실험해보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하는 것이다. 경험이라기 보다는 인내가 옳겠다." "교양이라는 것이 사람의 가장 내밀한 감각, 즉 영원에 대한 감각의 훈련이라고 정의한다면 사람은 자신의 교양을 위하여 여행을 하는 것이다." "고통받는다고 해서 무슨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카뮈가 죽고 난 후 태어난 나에게도 한번 생각해봄직한 말들이 되었다.

 

작가수첩을 번역한 사람은 김화영 박사다. 그는 박사논문으로 카뮈를 썼고, 교수있는 동안 카뮈의 전작품을 번역하는 등 우리나라의 최고의 카뮈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런지 뒤에 써있는 번역가의 해설은 카뮈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posted by ys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