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Book 2018. 12. 21. 21:24



<기나긴 하루>라는 책은 <기나긴 하루>라는 소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박완서 선생님의 단편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카메라와 워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닮은 방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단편소설 중 가장 인상깊게 있은 것은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였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인 2010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아마도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강하게 반영된 자전적인 이야기 같다. 주인공이 아버지를 일찍이 여윈 것처럼 박완서 선생님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다. 그리고 사정에 의하여 할아버지 조부모께서 작가님을 키우시게 되는 것도 동일하게 나온다. 그 때 느꼈던 심정들을 60년이 넘는 시간 전이지만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적어두었다. 부모가 없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큰 부재일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내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전혀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당연한 일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두고 채울 수 없는 큰 공백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감정들을 유난스럽지 않지만 조금은 헛헛하게 잘 표현된 것 같다.


또한 소설에서는 한국전쟁이야기가 나온다. 이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위의 부모의 문제와는 달리 한국에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 큰 충격으로 다가온 역사적 사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으로 헤어져서 수십년 넘게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러한 절대적인 고통이 시간을 지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해외여행도 어렵지 않게 다니는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 생인데 우리나라의 급변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님같이 1931년생들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도 어려운 세월을 보내왔다. 이 소설은 이를 짧게 그려낸다.


우리나라의 20세기는 너무나도 급변하는 시대라서 각각의 연대에 있는 소설가는 아마도 소재걱정없이 살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1,000년전인 10세기에는 930년생이나 980년생이나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생과 1980년생은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사회는 변화했다. 1930년생은 태어나자마자 일제 강점기였다. 그리고 나서, 소설에 나온 것처럼 일본어를 배우며 학교를 다녔다. 1940년은 이미 일본에 복속된지 30년이 넘는 시기에 사람들은 점차 우리나라 말을 잊고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히 일본이 패망한다. 그리고 몇 년 되지도 않은 시기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갓 성년이 된 나이에 남자들은 전쟁에 참여하고 여자들은 피난을 갔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폐허 속에 열심히 사는데 천착하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이승만 정권을 끌어내리는 4.19 시민혁명이 있었고, 민주화의 열망을 덮어버리는 5.16 군사쿠데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도 세우고, 지하철도 들어오고, 아파트도 생기는 변화를 겪는다(이 책에도 수록된 1974년 발표된 <닮은 방들>에서는 아파트에 살 것인지 단독주택에 살 것인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구공탄 이야기도 나온다.) 그리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 당하고 새세상이 오나 싶었는데 또다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시민들은 자유를 크게 제한받은 채 살아간다. 이때가 이미 50대가 된다. 그리고 환갑이 다가올 때 즈음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오랜 가난의 시간을 지나 세계적인 축제를 본 다는 것은 크나큰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선제가 다시 도입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도 된다. 그러나 97년 말에는 외환위기로 나라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다보면 우리나라 사회를 살았던 것만으로도 상당히 격동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작가는 이러한 격동의 시대의 한부분을 토대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만 해도 충분히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완서 선생님은 그가 느낀 바를 토대로 우리의 이야기를 잘 써내려간 좋은 소설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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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s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