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주 외 <투표행태의 이해>

Book 2021. 7. 9. 23:39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투표가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가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다. 다른 시민참여의 통로가 있겠지만 투표만큼 확실하고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시민참여는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투표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투표가 간단해 보여도 조금 들여다보면 그 결정까지 다양한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투표에 대한 연구물을 모은 <투표행태의 이해>는 투표 그리고 나아가 선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큰 도움이 되는 저작물이다.

이 책은 크게 투표행위에 대해서 5가지로 설명한다. 사회학적 접근법, 사회심리학적 접근법, 합리적 선택이론, 인지 심리학 이론, 그리고 신제도주의가 그것이다. 우선 컬럼비아 학파가 만들었다고 하는 사회학적 접근법은 유권자의 선호가 그들이 어떤 사회집단이나 사회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는가에 주요한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사회네트워크란 다양해서 그것이 지역이 될수도 인종이 될수도 사회계층이 될수도, 종교가 될수도 있다. 이 설명이 맞다면 선거운동이 유권자 태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기존 태도를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역주의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반면에 미시간 학파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학적 접근법은 정당일체감을 주장한다. 정당일체감이란 유권자가 어떤 정당을 대상으로 하여 상당 기간 내면적으로 간직하고는 애착심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이 정당일체감은 유권자들이 정당보고 투표하게 한다. 정당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은 옹호하고 반대당에게는 비판적인 눈길을 보내게 된다. 좋든 나쁘든 이런 사람의 행태를 설명하기에 좋은 관점이다.

그리고 합리적 선택이론은 정치경제학에서 내세우는 관점으로 전망적 투표(prospective voting)과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권자가 투표를 할 때 앞으로 잘 할 것 같은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이 전망적 투표이다. 반면에 회고적 투표는 그동안 해온 것은 평가하여 투표를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선거결과를 보면 회고적 투표가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동안 잘 했으면 표를 더 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 덜 주어 질책을 하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이론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인지심리학 이론이다. 인지심리학 이론에는 여러 측면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개념은 휴리스틱스라는 개념이다. 휴리스틱스(heuristics)란 후보자의 정책에 대해 특정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유권자가 현재 지식이나 느낌만으로 후보자나 정치적 대상에 대해 적절하게 추론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이 유권자가 가용한 정보를 전부 분석하여 판단을 내린다고 가정하는데 반해 휴리스틱스에 기반한 유권자는 몇몇의 정보의 조각으로 대충 판단을 내린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설득력이 있을 때가 많다.

마지막으로 신제도주의는 선거제도가 유권자에 행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인다. ‘제도주의라함은 제도주의가 있는 것인데 구제도주의는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구조와 법체제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말한다. 이를 비판하고 나온 것이 정치제도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를 운용하는 개인(또는 집단)의 형태에 대한 분석 행태주의(behaviorism)였다. 이를 또다시 극복하고 나온 것이 신제도주의인데 선거제도 자체가 유권자의 행태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예를 들어, 비례적 선거제도, 다수결 선거제도 등의 제도특징이 유권자 행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책에서 말한 여러 접근법 중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선거때마다 그 이유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선거를 보는 것은 더 선거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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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Book 2021. 7. 8. 14:29

죽음은 그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오는 존재이다. 평소에는 이 죽음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을 탕진하기도 한다. 그런데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그제서야 지나온 일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직접 죽음을 맞이하지 않더라도 한번 즈음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지금도 치료하기 힘든 루게릭병에 걸린 모리교수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는 추모하는 사람들이 멋진 말을 해주는 데 정작 주인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장례식을 거행한다. 사실 살아있는 장례식은 슬프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딱 좋은 행사인 것 같다.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속세를 본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는 검증된바가 없다. 만약에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면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그들이 장례식에 찾아오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기전에 직접 한번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죽었을 때 살아있는 장례식을 이미 치른 사람이 또다시 장례식을 치러야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수는 있겠다. 이 경우에는 가족과 아주 각별히 친한 사람 위주로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꿈들을 두둑해진 월급봉투와 맞바꿔 버렸다 (68).

 

인생은 한번뿐이다. 그런데 생활에 골몰하다 살다보면 어느새 나이는 들고 꿈꾸었던 많은 것들은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활비를 위한 월급을 받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소진한다. 여기에 쓰여지는 시간으로 인해 한번 뿐인 인생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제약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92)

 

인생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자기를 위한 삶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는 인생도 의미가 있다.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혼자 즐긴다면 그 맛이 덜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즐길 수 있어야 더 삶이 풍성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가? 혹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고 상대방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교육이 필요하지 않는가 싶다.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가 죽음을 두고 소란을 떠는 것은 우리를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이지. 인간이 자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239)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네 (240)

 

대부분 사람이 죽음을 싫어한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서 온힘을 다한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찾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죽음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사망한다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또다른 과정의 시작이라고 보는 관념말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러한 관념을 가져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태를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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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성 <채근담>

Book 2021. 7. 7. 22:05

채근담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직접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채근담의 뜻은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으면 곧 백가지 일을 가히 이루리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초근목피와 같은 조식을 달게 여겨 그 담담한 맛에서 참맛을 느끼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을 말한다고 한다. 읽으면 격언의 총집합이라고 할 만하다. 어떠한 의미에서 힐링도서의 원조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세월은 본디 길고 오래건만 마음 바쁜 이가 스스로 짧다고 한다.

 

나이가 갈수록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 청소년 때 한 달의 체감이 지금은 1년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친한 친구라도 1년에 한번 보면 꽤나 자주만나는 편이 되었다. 도무지 점점 빨라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어 어떠한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데 채근담에서 세월의 흐름은 그대로 인데 마음 바쁜 사람이 짧다고 하는 말이 큰 공감을 하였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책임질 일도 많이지니 점차 머리가 복잡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번잡함이 세월이 빠르게 흐르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기사 할 일없이 부양할 가족이 없다면 시간은 비교적 천천히 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와 관계없는 뉴스를 덜 보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겠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가 성겨지는 것은 헛된 형체의 시들어짐에 맡겨 두라. 새의 노래와 꽃의 웃음에서 변함없는 진리를 배우라.

 

요즘 예전과 달리 머리숱이 줄어서 걱정이다. 그리고 눈 밑이 약간 처지는 것 같다. 그렇다 나이가 든 것이다. 노화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인류의 숙명이다. 그런데 채근담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고 좀더 중요한 삶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한다. 역시 좋은 말을 이행하기 몹시 어렵다. 당장 피부과에 달려가서 시술을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노화를 받아들이라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채근담이 씌여질 당시에는 기술이 덜 발전해서 그럴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자연스러운 노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더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문득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라. 곧 원망이 절로 꺼지리라. 마음이 게을러질 때에는 문득 나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하라. 곧 정신이 절로 분발하리라.

 

채근담을 보면서 가장 내가 실제로 이행하는 글귀를 만나서 반가웠다. 나도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나의 위치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울 때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나태해질 때에는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배우기도하고 동기부여를 받기도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상대적이었고 비교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의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상대방과의 비교는 불가피할 경우가 많다. 그 비교가 불가피 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비교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채근담이 주는 조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채근담에 적혀 있는 말들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모두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의 참된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책은 계속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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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페스트>

Book 2021. 7. 6. 22:32

알베르 카뮈의 여러 걸작이 있지만 페스트는 근래 코로나 사태와 관련되어서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다. 카뮈가 페스트와 같은 대규모 감염병 사태를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2차 세계대전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와 같은 대규모 감염병이 퍼졌을 때 일어나는 사회와 인간군상에 대해서 아주 잘 그린 작품이다. 페스트가 1947년 작품이므로 벌써 70여년이 흘렀다. 그만큼이나 전염병을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도 바뀌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공통점도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스트에 나오는 상황이나 코로나 상황이 비슷한 것은 역시 공포다. 그동안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진보했다. 그래서 인류는 어느 정도 질병을 통제관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히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백신을 개발하는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렸다. 그 사이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새로운 질병, 그것도 전염속도가 무척 빠르고 치명률도 꽤나 높은 상황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해도 약간 기침을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졸인 적이었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람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활 전반을 지배했고 개운치 않은 기분을 가지고 살아야만했다. 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일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이러한 원초적인 감정은 계속 될 것이다. 미지의 질병에 대처 방안이 나오기 까지 인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페스트 상황보다 더 안좋아진 면도 있다. 소설에서 나오는 상황은 오랑시라는 곳에서 질병이 발생하고 도시가 봉쇄된다. 일단 소설은 이 안을 중심으로 그리기 때문에 다른 곳의 상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반면에 코로나의 경우에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하여 지구 곳곳에 퍼져나갔다. 이는 교통의 발달로인한 세계화로 인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1918년에 발생하여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영향이 적었다. 유렵에만 강타했을 뿐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구촌 어디에서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지구 어디더라도 안전한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화가 가져온 문제라면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지금 예전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역시 의료기술의 발전이다. 100년전과 확연히 다르게 발전된 의료기술 덕에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으면 일단 백신은 없었으나 문제를 완화하는 대책도 내놓게 되었다. 다만 이 문제가 각종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제대로 풀리지 않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봉쇄를 하여 단시간 안에 바이러스를 통제하면 좋겠지만 이렇게 되면 경제가 고사하게 된다. 경제는 마치 피의 흐름과 같은데 바이러스를 막겠다고 피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사회전체가 큰 파국에 처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어느 정부나라 쉽사리 문제를 풀지 못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우리 모두 전염병의 심각성을 인지하였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때 음압시설의 부족함을 개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물론 코로나급 사태가 터지면 음압시설을 비롯한 각종 대비시설이 절실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러한 각종 대비시설이 별 효용이 없다. 각종 대비시설을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상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대비시설을 증강하자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코로나같은 상황은 대비해야 한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정부는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사태때도 느꼈지만 방역과 경제를 동시에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이번 경우에는 시민들의 높은 정책순응으로 비교적 다른 나라에 비해 잘 넘어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 지는 장담할 수는 없다. 참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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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Book 2021. 7. 5. 23:40

사실 정치학을 배운다고 해서 정치를 갑자기 더 잘한다거나, 갑자기 정치의 흐름이 잡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질의 정치학 책을 읽다보면 현상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것이 실생활에 금전적으로 도움이 직접적을 되지 않아서 허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치에 대한 소양을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임혁백 교수의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는 임교수가 그동안 써온 글을 모은 것인 데 그의 탁월한 식견과 글솜씨로 책을 읽을 맛이 난다. 그리고 그의 의견을 토대로 여러 아이디어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 여러 생각해볼 만한 개념이 나오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개념은 제도화된 불신(institutionalized distrust)이다. 임교수는자유민주주의는 불신의 제도화를 통해서 신뢰를 구축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데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공무원이 있고 일반시민을 대표하는 입법자가 있다. 그런데 이미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시민을 위해서 헌신을 다하는 공무원과 정치인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정책을 입안할 때나 국정을 운영할 때,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성선설입장에서 바라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성악설의 기반하여 통제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행정학에서는 공공봉사동기(Public Service Motiv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다양한 하위요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소방관이나 국립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을 보면 이러한 동기를 느낄 수 있다. 반면에 니스칸넨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은 공무원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본다. 물론 본 이론에서는 부처의 크기를 크게하고 자신의 권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만 요즈음 LH공사 직원이 부동산 투기 행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각종 정책을 쓸 때 시민의 입장에는 후자의 입장에 서야한다고 본다.

공직자들의 각종 비리와 비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책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투명성을 높여야한다. 최근 공군에서 여성부하를 성폭행하여 여성장교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은 성폭행하는 것이 증거로 남겨져 있었다. 아마 이러한 증거가 없었더라면 분명히 공군에서는 그런일이 없었다고 쉬쉬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요즘 군인들에게 나오는 밥의 질이 엉만진창이라는 것도 휴대폰이 반입이 되고나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아마 휴대폰이 없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썩어 있는 곳에 햇빛을 쐬게 하면 문제는 완화될 여지가 있다.

아마 그저 사람을 신뢰한다면 문제는 반드시 재발한다. 아주 사람을 믿지 못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를 철저히 제도화하고 정책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역설적으로 신뢰로운 사회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앞서 공직자의 경우를 이야기했는데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CCTV는 사회 신뢰를 증가시키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CCTV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못믿겠다는 것이다. 모두 믿을 수 있다면 CCTV는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계가 없었을 때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있었을 것이며, 억울함이 있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불신을 기반으로 한 CCTV가 사람들 서로를 배려하게 만든다.

불신을 통해서 신뢰를 만든다는 말이 어불성설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거래비용이 적게드는 방식으로 불신을 제도화 시킨다면 사회는 더 신뢰가 번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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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엘리엇 <땅콩박사>

Book 2021. 7. 4. 23:00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살았다. 정말 이런 사람이 인간인가 싶은 사람부터 이런 사람이 혹시 신이 아닐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았다. 그 중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중심으로 배우게된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정치인도 있지만 정치인이 아닌 다른 사람도 다양하게 많다. 그리고 잘 몰랐지만 훌륭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좋은 사람을 아는 것 만큼이나 큰 기쁨이다.

나는 <땅콩박사>라는 책을 15여년 전에 아는 분에게 받았다. 그 후 전혀 읽지 않고 15년 넘게 방치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제로 붙은 조지 워싱턴 카버 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조지 워싱턴도 아니고 조지 워싱턴 카버는 처음 듣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나는 내가 참 무식한 사람이었음을 또다시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는 누구인가? 그는 1864년에 태어나 1943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책에도 나와있듯이 그는 노예해방이 되는 해에 태어났다. 물론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공언하기는 했고 남북전쟁에서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군이 전쟁에서 지기는했찌만 실상 갑자기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흑인에게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온 과학자였다.

흑인위인이라고 하면 마틴 루터킹이나 말콤 엑스, 로자 팍스같은 흑인인권운동가가 먼저 떠오른다. 물론 그들이 한 일은 대단하다. 하지만 꼭 인권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위인이 될 수 있다. 조지 카버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특별히 목소리를 내서 흑인의 인권은 드높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묵묵히 걸어온 길이 바로 흑인인권을 개선했다. 예를 들어, 그가 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백인 교수가 거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향학열로 대학교육을 받는다. 그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교육을 받고 연구를 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물론 중간에 단순히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사실 자신의 길을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의 담담한 걸음걸이가 흑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땅콩이 지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시로는 비주류적인 연구를 하는데 흑인이라는 비주류 인종이 비주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을 탠데 정말 대단하다. 연구자라면 한번 즈음 그의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 중의 하는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와서 그런지 그의 신앙에 대해 언급이 나온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사실 신앙의 힘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런데 조지 카버가 걸어온 고난의 길을 보면 아마도 신앙이라는 힘이 그를 버티게 한 것 같다. 각종 말도 안되는 모멸을 겪으면서도 그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인 정신상태로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마틴 루터 킹도 목사였다는 것이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긍정적으로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앞으로도 신앙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해서 개인이나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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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the Brick>

Exhibition 2021. 7. 3. 23:49

Nathan Sawaya 작가의 The Art of the brick은 레고를 예술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레고하면 한때는 아이들의 두뇌발달촉진을 이끄는 장난감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근래에는 레고를 즐기는 어른들도 많이 늘어났고 이제 레고는 어린이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낫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 이제 예술로 넘어간 경지를 네이슨 사와야는 보여주었다. 입장할 때는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들어나고 나서 이 사람은 정말 아티스트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 면에서 놀랍다. 첫 번째는 레고를 통해서 표현해내는 작품 자체의 예술성이다. 흔히 레고라고 하면 매뉴얼대로 레고를 조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분은 매뉴얼을 전혀 없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레고라는 도구로 표현해낸다. 그의 대표작으로 사람이 가슴을 뜯어내는 조각이 있는데 인간의 고통을 정말 잘 구현해 내었다. 레고라는 독특한 질감이 더 가슴에 와닿게 하였다.

그의 원천적인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만약에 그 아이디어만 본다면 굳이 전시회 장에 갈 필요가 없다. 도록을 보거나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아 그렇구나하는 식으로 감상하면 된다. 그런데 전시회에 꼭 가야하는 이유는 실물이 주는 경외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들이 큼직큼직하다. 실물로 보면 이런 것을 직접 혼자 만들었다는 것에 박수가 저절로 나온다. 나는 메이킹 필름을 보았는데 정말 노동 그 자체이다. 그리고 실물로 주는 감동이 확실히 있었다. 만약에 내가 그 저 인터넷으로만 보았다면 이 정도의 감동을 못느꼈을 것이다.

작품 외에 신기했던 점은 작가의 걸어온 길이다. 원래 사와야는 변호사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변호사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고 예술가에 비해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있어서는 훨씬 용이하다. 성실하게 살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대단한 로펌에 가서 엄청난 금액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지장이 없이 살 수 있다. 인문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그런데 취미로만 했었던 레고 예술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아예 그만 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변호사를 그만둔 결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는 레고 예술가(지금도 생소하다)라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 일에 대해 진심이었던 것 같다. 변호사일로 인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레고 작품에 쏟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정말 싫었던 것이다. 그 정도도는 되어야지 멀쩡한 직업을 그만둘 수 있는 결단이 생길 것 같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두둑했던 것 같다. 변호사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는데 레고 아티스트요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들의 신경을 썼다면 도무지 변호사를 그만두고 레고 아티스트를 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해석은 아마도 그가 매우 잘 사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었을 까하는 추측이다. 만약에 그가 유산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일을 안할 정도로 부유하다면 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레고 작품을 만드는 데에도 꽤나 비용이 들어가는데 각종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이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고 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라는 확실한 생업을 저버리고 레고 아티스트를 할 정도라면 경제력이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에 이 추측이 맞다면 꼭 예술이 배고파야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의식주 생활에 걱정이 없을 때 더 독특한 시도를 해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만하더라도 큰 근심없이 시간이 많을 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근본 이유야 그렇다치고 확실히 사와야는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높은 수준으로 구축하였다. 그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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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Exhibition 2021. 7. 2. 01:56

남대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숭례문이 양방향으로 개방되어 다녀와보았다. 생각해보니 숭례문을 직접 지나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20082월 어처구니 없는 방화사건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벌써 13년 전 일이다. 2013년에 복구공사를 다마쳤고 그동안 정문만 열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숭례문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 모르고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숭례문은 1396년 태조 5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398년 태조 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신을 마중하고 배우하는 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할 때도 관료들이 숭례문에서 전송하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통금시간이 있어서 통금시간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종이나 북으로 성문을 여닫는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차 서울이 팽창하며 근대 도시화되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의례적 기능은 사멸되었다. 심지어 1899년에는 숭례문 아래로 전차가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이후에는 주위로 도로가 지나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는 내부로 진입되지 못하게 되었고 숭례문에 주변 도로에 둘러쌓인 형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의 모습이 지금까지 느낌으로 남아있어서 가끔 애국가같은 것을 볼 때, 남대문을 주위로 여러 차들이 지나다는 것을 멋있게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숭례문을 사람들과는 떨어진 존재로 만들어낸 것 같다. 지금도 길을 건너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앞뒤로 들어갈 수 있어서 그 숨통이 조금은 트인 것 같다.

숭례문이 우리 국민의 제1의 문화재로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국보1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숭례문은 국보1호의 위치에서 내려(?)온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국보는 334, 그리고 보물은 2110호까지 있다고 한다. 문제는 국보 1호라고 함은 행정적인 의미에서 1, 2호라고 지은 것이지 숭례문이 국보 2(원각사지 10층석탑)보다 더 중요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334개 모두 중요하지 숭례문이 국보 챔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이참에 아예 번호를 매기는 것을 없애기로 했다.

숭례문이 국보가 1호가 된 것의 유래는 일본이 숭례문을 일제강점기 당시 보물1호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된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는 1962년에 문화재 보호법을 정할 때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정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꼭 숭례문이 왜 국보의 최고자리에 있어야하냐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참에 번호를 제거하여 국보 사이의 서열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국보1호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숭례문을 1호라고 부르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다. 특히 이렇게 국보에 번호를 붙이는 나라가 전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한다. 아마도 얼마 후에는 국보1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기성세대나 늙은 세대라고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국보 1호가 아니더라도 숭례문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수도였고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핵심부에 당당히 자리한 그 모습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더 번창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숭례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방문에서 도심 속의 성이라고 사진 한 장 찍는 곳이 아니라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2008년에 아픔이 있었지만 아픔을 딛고 발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건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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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Book 2021. 7. 1. 01:43

정치는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미친다. 정치인이 어떠한 정책을 진행시키고 법을 만드냐에 따라서 사회의 질은 좌지우지된다. 문제는 정치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과정이다. 일단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갈등을 노정하고 봉합하는 과정은 마치 깨끗한 수술이 드문것과 마찬가지로 어렵고 때로는 꺼려지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체계에 따라서 이성적인 숙의가 어려운 것도 정치이기도 하다. 정치뉴스 댓글에 가면 별의별 말도 여과되지 않은 의견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하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숙명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길을 개척하려면 약간의 정치 해설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차분히 읽어볼만 양서이다.

책 제목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이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훨씬 전인 대한민국 건국때부터 이 책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책은 현상태에 이르게 한 우리나라의 여러 중요한 포인트를 잘 정리해두었다. 나는 우리나라만 지금 상태에 이를 때까지 역사적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식민치하를 겪었고, 동족상잔의 아픔도 겪었고, 군부독재도 거쳤다. 이 모든 것 어느 것 하나 극복하는 것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여러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국가도 식민지, 내전, 독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특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대단한 것은 이것을 겪어 내고 선진국 대열에 선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역사적인 전진을 이룩한 것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다.

 

우리 사회가 어떤 영웅적 해결자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사회 심리적 경향은 과도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이는 현실적이고 건전한 대안을 조직하고 제도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255).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대통령제인 우리나라는 아직도 대통령의 권한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인지 시민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상당하다.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기대가 실망을 가져온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누구한명이 바뀌어서 갑자기 선진화를 꿈꾸기 보다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시스템으로 사회가 움직인다는 것이 기득권을 위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에게 납득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나라가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도 더 깊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합의는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니라, 여러 대안들 간의 경쟁을 통해 다수 의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결과를 말한다(251).

 

근래 걱정스러운 부분은 사회적 갈등이 첨예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갈등이 있는 것은 사회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건강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갈등은 병이다. 일단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타인의 생각을 바꿀 생각을 하면 안된다. 일단 인정은 하되 현실적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안을 찾고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갈등이 병적인 수준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은 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갈등을 사회적 합의로 승화시키는 시민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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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 <해방촌의 채식주의자>

Book 2021. 6. 21. 01:34

 

 

나 스스로는 그렇지 않아서 그런지 뻔한 사람보다는 독특한 사람이 매력이 있다. 독특하다라는 점에서 전범선은 아주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이력은 아주 범상치 않다. 민족사관고등학교, 다트머스대학교, 그리고 옥스퍼드에서 석사 그 후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다. 그 후에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록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동물에 대한 권리를 중시하고 그래서인지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만을 나열해도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좋은 학교를 가는 이유가 대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함이라는 상식이 있다. 그런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길을 걷을 때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가끔 멀쩡한 학교, 직장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나와서 종교인이 되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분명히 그렇지 않은 이유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전범선씨의 <해방촌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왜 그가 로스쿨을 가지 않고 역사학으로 석사까지 했는지 그리고 돈이 잘 되지 않는 서점을 운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약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온 대략 30여년의 세월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잘 서술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00쪽 정도의 짧은 책이지만 한번 즈음 생각해볼 이야기를 여러개 던져놓았다. 그 중 하나는 민족사관학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소수영재교육의 대표주자인 민족사관학교는 아주 똑똑한 학생들이 간다. 그런데 과학고나 외고와는 달리, 수업을 국어, 국사를 빼고는 영어를 쓴다. 나도 이점을 알고 있었는데 국제화에 발맞추었거니하고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약간만 더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학교 이름이 민족인데 영어로 수업을 하다니. 더 놀라운 것은 영어를 쓰지 않으면 벌점을 받는 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어이름을 권장한다고 한다. 100년전 우리 선현들이 우리 말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이름조차 강제로 바꾸어야 했는데 자발적으로 우리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이름도 바꾸는 것이었다. 이러한 학교가 무슨 민족사관학교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그의 해석 매우 흥미로웠다.

미합중국이 대영제국에서 나왔듯이, 대한민국도 미합중국에서 나왔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와넌 독립하는 데 150년 넘게 걸렸고 이제는 서로 든든한 우방으로 잘 지낸다. 한국은 건국 100주년이지만 아직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일부다. 그게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살고, 나아가 선진국 반열에 오른 기저에는 미국의 도움이 컸다. 미국 모델을 잘 따라왔기 때문에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로큰롤 역시 미국 문화다. 좋든 싫든 미합중국은 대한민국의 뿌리고 나의 정체성이다 (42).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하고 말았다. 물론 우리나라가 미국과는 다르다. 하지만 광복 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뿌리가 어쩌면 미국이라는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내가 사고하는 방식은 미국인과 더 비슷하지 북한사람하고 더 비슷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사관학교의 영어교육철학(민사고에서는 영어는 앞서간 선진문명 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의 목적이 아니라라고 본다)에 대한 의문은 물론이고,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이 책이 매력적인 점은 사고의 솔직함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더라도 미국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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