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매헌 윤봉길>

Book 2021. 10. 9. 20:34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윤봉길이라는 이름 석자는 안다. 하지만 우리가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 외에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윤의사님께서 짧은 인생을 불꽃같이 살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폭탄의거를 제외하고도 나라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거 전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거사를 치러내실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매헌 윤봉길>은 윤봉길 의사가 걸어온 길을 담담히 적어놓았는데 그의 발자취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다.

윤의사님께서 24세에 돌아가시기 때문에 아무리 그 당시 평균나이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상해에서의 거사만 하셨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거사를 치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단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는 고향에서 농촌운동을 한다. 매헌은 농촌에서 야학 활동을 하는데 교육을 위해서 <농민독본>을 직접 집필한다. 그 책을 기초로 우리나라 농민을 일깨우려는 노력을 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아마도 폭탄의거라는 큰 사건에 매헌이라고 하면 공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윤의사님이 도시락 폭탄을 냅다 던진줄로만 알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폭탄을 던지지까지는 극강의 인고의 시간이 있었다. 물론 의거를 자체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윤의사님은 단계를 밟아서 임무를 맡았다. 우선 중국으로 망명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김구선생님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임시정부 입장에서 윤의사님같은 의기로운 젊은이가 모여드는 것은 좋지만 확실한 실력와 타이밍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윤의사님은 어떻게든 일본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빨리 무언 가를 하고 싶어했는데 지도부에서는 일단 적당한 때를 기다려보자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에 시달리던 윤의사님은 괴로웠지만 분기를 다스리면서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기다린 끝에 때는 찾아왔고 오랜 기다림이 떨릴 수도 있었겠지만 담담하게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윤의사님은 때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중 하나는 아마도 고국에 있는 가족때문일 것이다. 사나이로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하겠다고 가족을 떠나 중국으로 왔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뜻을 접지 않았다. 그리고 거사를 성공했을 때에는 가족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 뻔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25세였던 그에게는 두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윤의사님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한 한이 있겠지만 아버지께서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그 어느 집안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긍심이 될 것이다.

그의 고결한 위엄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가 죽기 전에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해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의 대세에 의해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 마지 않으면,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말 남자다운 풍모이다. 힘없는 여자들을 성폭행하는 거지같은 남자의 반대의 모습같다. 진짜 사나이가 윤봉길이다.

그가 거사를 치르고 이 세상을 뜬 것이 1932년이다. 벌써 9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윤의사님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의사님 같은 분들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그 빚을 갚는 방법은 독립적으로 더 잘 사는 수 밖에 없다. 만약에 또다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면 윤의사님은 테러리스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국력을 길러 그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yslee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Exhibition 2021. 6. 8. 00:46

나는 가끔 삶이 힘들 때, 독립운동가분들의 기념관을 찾는다. 독립운동가분들의 고초를 보면 내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지 되뭍게 된다. 나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의 부질없는 사리사욕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양재에 있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과>도 나의 옹졸함을 깨우쳐 주었다.

내가 기념관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윤봉길 의사께서 25살에 거사를 치르셨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의사님께서 30대 중반 정도에 의거를 일으키신 줄 알았다. 2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불태워 나라의 정체성을 확인시킨 것이었다. 내가 25세에 기껏해야 제대해서 학점관리하느라 정신없었던 것을 기억하면 부끄러워 진다.

윤의사님께서는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돌아가셨다. 의사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있었고 1910년에 경술국치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태어나실 때부터 아예 나라가 패망해버린 것이다. 의사님께서 12세였던 1919년에 3.1운동이 있었다. 아마 이 사건은 의사님의 어린날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의사님은 가정교육을 잘 받으신 것 같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망해있고 가정이 엉망이면 그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비분강개하셔서 독립운동을 결심하셨으니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힘들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윤의사님 연배의 우리나라 조상님을 생각해보면 극한의 어려움에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의사님의 걸어온 길을 보면서 그 전에는 몰라서 가장 놀란 점은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기준으로 15세에 결혼하신 것도 놀랍고 25세가 되시기 전에 3명의 자녀를 둔 것은 아주 놀랄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다. 내가 이것보다 인상깊게 보았던 점은 아이가 있는데도 독립운동을 감행하신 것이다. 사실 아이가 있으면 현실에 부조리한 점이 있더라도 꾹 참고 살기 마련이다. 아이를 두고 그 부조리를 고치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큰 희생을 일으킨다. 만약에 의사님이 싱글인데 거사를 일으켰다면 그나마 조금이나마 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만하다. 그런데 아이가 3명이나 있는데 거사를 일으킨 것을 보고 이 분은 초인적인 신념으로 거사를 일으켰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윤의사님이 남자로서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는 점이다. 이 말의 뜻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가끔 남자답다고 하는 것이 객기를 잘 부리를 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남자답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은 오히려 남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좋은 의미로 남자답다고 하는 것은 의로운 뜻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연한 각오를 가지고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의사님은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멋진 남자로서도 본받을 만하다.

2021년에 세상은 의사님이 사는 세상과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의로운 뜻을 세울 곳은 지금도 아직 많다. 의로운 뜻을 세우는 일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 만약에 윤의사님이 그저 3명의 자녀를 키우는데 급급하여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는 조선인으로 살았다면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일상의 무게에 삶이 옹졸해짐을 느낀다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가는 것을 추천하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자신이 둘러싼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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