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매헌 윤봉길>

Book 2021. 10. 9. 20:34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윤봉길이라는 이름 석자는 안다. 하지만 우리가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 외에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윤의사님께서 짧은 인생을 불꽃같이 살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폭탄의거를 제외하고도 나라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거 전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거사를 치러내실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매헌 윤봉길>은 윤봉길 의사가 걸어온 길을 담담히 적어놓았는데 그의 발자취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다.

윤의사님께서 24세에 돌아가시기 때문에 아무리 그 당시 평균나이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상해에서의 거사만 하셨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거사를 치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단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는 고향에서 농촌운동을 한다. 매헌은 농촌에서 야학 활동을 하는데 교육을 위해서 <농민독본>을 직접 집필한다. 그 책을 기초로 우리나라 농민을 일깨우려는 노력을 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아마도 폭탄의거라는 큰 사건에 매헌이라고 하면 공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윤의사님이 도시락 폭탄을 냅다 던진줄로만 알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폭탄을 던지지까지는 극강의 인고의 시간이 있었다. 물론 의거를 자체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윤의사님은 단계를 밟아서 임무를 맡았다. 우선 중국으로 망명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김구선생님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임시정부 입장에서 윤의사님같은 의기로운 젊은이가 모여드는 것은 좋지만 확실한 실력와 타이밍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윤의사님은 어떻게든 일본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빨리 무언 가를 하고 싶어했는데 지도부에서는 일단 적당한 때를 기다려보자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에 시달리던 윤의사님은 괴로웠지만 분기를 다스리면서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기다린 끝에 때는 찾아왔고 오랜 기다림이 떨릴 수도 있었겠지만 담담하게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윤의사님은 때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중 하나는 아마도 고국에 있는 가족때문일 것이다. 사나이로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하겠다고 가족을 떠나 중국으로 왔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뜻을 접지 않았다. 그리고 거사를 성공했을 때에는 가족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 뻔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25세였던 그에게는 두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윤의사님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한 한이 있겠지만 아버지께서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그 어느 집안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긍심이 될 것이다.

그의 고결한 위엄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가 죽기 전에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해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의 대세에 의해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 마지 않으면,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말 남자다운 풍모이다. 힘없는 여자들을 성폭행하는 거지같은 남자의 반대의 모습같다. 진짜 사나이가 윤봉길이다.

그가 거사를 치르고 이 세상을 뜬 것이 1932년이다. 벌써 9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윤의사님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의사님 같은 분들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그 빚을 갚는 방법은 독립적으로 더 잘 사는 수 밖에 없다. 만약에 또다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면 윤의사님은 테러리스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국력을 길러 그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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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Exhibition 2021. 6. 8. 00:46

나는 가끔 삶이 힘들 때, 독립운동가분들의 기념관을 찾는다. 독립운동가분들의 고초를 보면 내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지 되뭍게 된다. 나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의 부질없는 사리사욕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양재에 있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과>도 나의 옹졸함을 깨우쳐 주었다.

내가 기념관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윤봉길 의사께서 25살에 거사를 치르셨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의사님께서 30대 중반 정도에 의거를 일으키신 줄 알았다. 2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불태워 나라의 정체성을 확인시킨 것이었다. 내가 25세에 기껏해야 제대해서 학점관리하느라 정신없었던 것을 기억하면 부끄러워 진다.

윤의사님께서는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돌아가셨다. 의사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있었고 1910년에 경술국치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태어나실 때부터 아예 나라가 패망해버린 것이다. 의사님께서 12세였던 1919년에 3.1운동이 있었다. 아마 이 사건은 의사님의 어린날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의사님은 가정교육을 잘 받으신 것 같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망해있고 가정이 엉망이면 그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비분강개하셔서 독립운동을 결심하셨으니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힘들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윤의사님 연배의 우리나라 조상님을 생각해보면 극한의 어려움에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의사님의 걸어온 길을 보면서 그 전에는 몰라서 가장 놀란 점은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기준으로 15세에 결혼하신 것도 놀랍고 25세가 되시기 전에 3명의 자녀를 둔 것은 아주 놀랄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다. 내가 이것보다 인상깊게 보았던 점은 아이가 있는데도 독립운동을 감행하신 것이다. 사실 아이가 있으면 현실에 부조리한 점이 있더라도 꾹 참고 살기 마련이다. 아이를 두고 그 부조리를 고치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큰 희생을 일으킨다. 만약에 의사님이 싱글인데 거사를 일으켰다면 그나마 조금이나마 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만하다. 그런데 아이가 3명이나 있는데 거사를 일으킨 것을 보고 이 분은 초인적인 신념으로 거사를 일으켰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윤의사님이 남자로서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는 점이다. 이 말의 뜻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가끔 남자답다고 하는 것이 객기를 잘 부리를 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남자답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은 오히려 남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좋은 의미로 남자답다고 하는 것은 의로운 뜻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연한 각오를 가지고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의사님은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멋진 남자로서도 본받을 만하다.

2021년에 세상은 의사님이 사는 세상과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의로운 뜻을 세울 곳은 지금도 아직 많다. 의로운 뜻을 세우는 일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 만약에 윤의사님이 그저 3명의 자녀를 키우는데 급급하여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는 조선인으로 살았다면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일상의 무게에 삶이 옹졸해짐을 느낀다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가는 것을 추천하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자신이 둘러싼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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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관>

Exhibition 2019. 8. 1. 22:30

근래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의 갈등은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일본의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만행을 잊은 듯한 후안무치한 언행과 행동은 현재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노키기고 있다. 또한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분단되기 전에 살아계셨던 분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가는 시절이다. 70년이라는 세월은 분단이라는 상태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만약에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기에 상상해보았자이지만 그래도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백범김구기념관>에 다녀왔다.

1876년 김구선생님 어머니는 백범선생님을 무려 1주일간의 진통을 거친 후에 출산하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진통이 오면 산부인과에 가고 만약에 진통이 너무 길어지면 무통주사를 맞거나 협의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러한 기술을 커녕 신생아가 죽지 않으면 다행일 시절이었다. 난산이었지만 그래도 김구선생님은 잘 성장하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국은 조선왕조 말기였다. 그가 청년 때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다방면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국운을 바꿀 수는 없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많은 청년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1997IMF 경제위기 때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충격을 나도 기억한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경험은 IMF 경제위기와는 비견할 바가 안되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린 분들이 이 세대가 많다 예를 들어, 이시영 선생님 1869, 안창호 선생님 1878, 안중근 의사님 1879, 김창숙 선생님 1879, 신채호 선생님 1880년 등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망국의 과정을 목도했다.

백범선생님의 여러 업적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조직을 만들어서 독립을 위한 끈질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91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원래 조선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사람인줄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범선생님 같은 분들 덕분에 191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도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장봉기도 매우 중요하지만 임시정부를 세우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음을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사실 국가라는 것이 그 영토에 살고 있는 국민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제사회의 인정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에 국제사회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우리는 일본에 복속되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견뎌왔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백범선생님을 비롯한 유수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한 이유는 너무 명백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분들이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끈기이다. 35년이 넘는 세월을 독립운동을 매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후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다. 30대 때 일제 치하에 들어가서 거의 70대가 되어서야 광복이 된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인생의 대부분을 독립을 그리며 살아간 것이다. 이광수 같은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변절하여 일제에 충성한 것을 보면 백범선생님의 그 녹녹치 않은 세월을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티신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도 경외감을 느낀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더 어려운 것들도 이겨냈던 독립운동가들의 경험 덕분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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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평전>

Book 2019. 1. 13. 22:26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투사 중의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안창호평전>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더욱더 도산선생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느낀 것은 독립투사로서 도산이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도산이다. 독립운동가 중에 결혼한 사람도 있다. 물론 독신으로 독립운동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수 있겠지만 20세기 초반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과 달리 결혼은 필수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혼은 했다. 도산선생님도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고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산선생님도 아들걱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생활을 하는 아들에 대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필립이가 장사를 못하고 남에게 고용하는 바에 할 수 있으면 그곳 포드자동차 회사에 상당한 잡을 얻어서 일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썼다.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 도산에 대해서 공감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그저 평범한 아버지로만 남았다면 도산이라는 이름은 후손인 우리에게 남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비범하게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흥사단이다. 선생님께서 열심히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지쳐갔다. 과연 이렇게 힘들게 독립을 위해 투쟁을 한다고 해서 과연 독립이 될지 회의감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께서 흥사단을 결성하고 힘을 쓰는데 있어서 비관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적인 문답법으로 그의 움직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293).


: 어떻게 힘을 쓰는 것이 우리에게 독립의 영광의 날이 오게 하는 길이 되겠소?

: 흥사단을 힘있게 하는 일이오.

: 그까짓 흥사단, 1개 작은 단체에 국가 흥망의 운명이 달릴 수 있겠소. 게다가 흥사단은 정치 단체도 아니요, 독립 운동하는 혁명 단체도 아니고 아직 100명 내외의 단우를 가진 수양단체에 불과하거늘, 이 흥사단이 그처럼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겠소?

: 글쎄요. 그렇게도 생각이 됩니다만 그래도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역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완전한 국민이 되도록 수양하면서 그 사람들이 굳게 단결하여서 전 국민을 다 건전한 국민이 되도록 힘쓰는 길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 흥사단은 정치 단체가 아니요, 일개 수양단체인데, 일개 수양단체 따위가 아무리 크기로 어ᄄᅠᇂ게 광복 사업을 성취하고 또 옳은 정치를 할 수가 있겠소?

: 수양한 건전한 인격자가 많이 생기면 그들이 정치가도 되고 교육가도 되고 실업가도 되어서 건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건전한 국민이 많은 나라에서는 부정한 개인이나 당파가 쓰일 일이 없을 것이니, 국민을 건전히 하는 것이 국가를 건전케하는 기초라고 믿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파가 있었다. 도산 선생님은 그 중에서 교육을 중점을 둔 독립투사셨다. 우리 국민이 수준이 있으면(당연히 정치인 포함) 이렇게 일본에게 나라도 빼앗시지도 않았을 것이며 빼앗긴 나라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급진 무장파에서는 선생님을 못마땅하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양한 부류의 독립운동가들은 각각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다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작지만 시작을 하고 동력을 얻어서 점차 사람들을 변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나라의 탄탄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 크게 동의한다. 처음부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도산선생님께서 뿌린 작은 씨앗이 자라서 일본이 패퇴한 후에도 일본에 복속되어 있지않고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지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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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기념관>

Exhibition 2018. 12. 5. 17:11




서래마을에서 9호선을 타기 위해 내려가다가 우연히 <심산 김창숙 기념관>에 들리게 되었다. 반포에 꽤 오랫동안 살았던 나로서는 언제 이런 곳이 생겼는지 의아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은 물론 심산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지만 오로지 기념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서초구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건물에 1층에는 가장 중요한 심산선생님 기념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볍게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북카페가 있다. 지하에는 독서실과 서초창의허브가 있다. 그리고 2층에는 심산아트홀이 있어서 여러 공연을 관람하거나 직접 대관할 수도 있다. 3층에는 심산기념사업회 사무실과 교육실이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주민들과 호흡할 수 있게 기념관을 꾸려놓았다는 점이 좋았다. 간혹 위인의 전시관이라고 해서 너무 전시에만 몰두하다 보면 일반인들과의 괴리가 생기고는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덜 찾게 된다. 그와 달리 심산 기념관은 심산 선생님은 심산 선생님대로 기리고 생활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심산 선생님의 뜻을 실현했다고 본다. 만약에 여러 생활밀착형 시설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심산 선생님에 대해 덜 인지하였을 것이다.


1층에 구비된 심산 전시관은 연대별로 6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역1은 심산 선생님의 연보가 나와있고, 구역2 심산 선생님의 어렸을 시절이 나와있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웠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1879년생이신 선생님의 출생시기를 생각한다면 유학을 주류로서 배우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하다. 물론 지금도 유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글을 배우는 사람은 응당 알아야하는 것이 유학이었다. 선생님이 유학을 배우고 난 후 나라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유학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다. 구역 3에서 본격적으로 선생님이 구국운동을 나선 이야기가 나온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1910년 성명학교를 설립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신다. 이때가 선생님의 20대였을 시기였는데 나라가 빼앗기는 과정을 보는 것을 청년 김창숙을 좌시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구역 4에서는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가 억울하게 식민지배를 받았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셨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일본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분의 결기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식민지배를 끝내고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다. 구역 5에서는 광복 이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을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를 비판하시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으로서 운영한다. 일평생을 나라를 위해서 고민하신 선생님은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시는데 그의 올곧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구역6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은 그렇게 크지는 않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음미하며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다. 구성이 연대별로 잘 되어 있어서 짧은 시간을 통해서 인간 김창숙의 걸어온 길을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실 초입에 영상실이 있다. 이 영상실에서는 심산 선생님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데 이것을 보고 보면 더욱 이해를 빨리 할 수 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많이 남기셨다. 그 중 마음에 걸리는 말씀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현재의 세대는 예전 세대보다 교육의 절대수준이 훨씬 높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알기만하고 그 배움을 바른 길로 옮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상당한 낭비이다. 심산 전시회를 통해 배운 것을 영감삼아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행동을 해보기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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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Book 2018. 10. 8. 03:17

독립운동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아마도 안중근, 유관순, 김구 선생님일 것이다. ‘김창숙이라는 이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이 책 <김창숙>을 보면서 유림의 대표주자로서 김창숙이라는 인물이 우리나라 독립 그리고 대한민국 발전에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알게 되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님은 1879년 경북 성주출신으로서 조선왕조 말기 때 태어났다. 그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행하게도 국권이 피탈되는 경험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점차 망해가고 있는 나라였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지 만은 않았다. 그 중 한 노력이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 운동이었다.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여 우리나라가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막으려 애를 쓰셨다. 불과 100여년이 지난 1979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 1800년대 말에 태어나신 분들의 고초가 얼마나 거대할 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국채운동이 벌어진 때는 선생님이 20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30대 때 일본과 공식적으로 지배를 당하고, 60살이 넘어서야 나라가 광복을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일평생을 나라가 망하고, 일본에게 지배당한 나라에서 사셨으니 그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해볼 계기를 가졌다. 김창숙 선생님은 수구적인 충군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송병준, 이용구 등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제기하고 있을 때 황제가 합방을 허가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우리 황제께서 나라를 팔아넘기는 역신의 말로 인해 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허가하더라도 이는 어지러운 명령이니 결코 따르지 않겠다.” 이에 대해 다시 황명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 아니겠냐는 물음에 그는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운데, 난명에 따르지 않음이 충이다(46).”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그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중요하다. 정권의 노예가 되어서 영혼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불법적인 일을 하라는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공무원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권보다는 대한민국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이 된 후의 사회에 대해서 유교 내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창숙 선생은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많은 유림들이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독립 후에 왕이 다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림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대단한 것은 반대로 불구하고 다른 유림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려는 노력과 끈기였다.

그리고 그의 오롯함으로 일본법정에서도 나타난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는데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변호를 거부함은 대의가 매우 엄하다. 나는 대한 사람이고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룰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하면 그 대의에 모순됨이 어떻겠는가...나는 포로이다. 포로이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함은 치욕이다. 실로 내 지조를 바꾸어서 타인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96~97).”

선생님의 일관성있는 논리와 절개에 나는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 독립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선 것이다. 정말 숭고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다행히 살아 생전에 광복을 맞으셨다. 그리고 광복 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신탁반대운동부터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싸우기까지 노인이 된 후였지만 고군분투하셨다. 선생님께는 19625월에 84세로 돌아가셨다. 1960년에 4.19혁명 그리고 19615.16 군사정변이 있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나라의 희망을 보았지만 또한 그것이 좌절되는 것까지 보시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 상상해보건데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격변의 현대사를 몸소 겪고 그 역사를 만드시면서 많은 일을 하셨다. 더 많은 김창숙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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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s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