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한지테마파크>

Exhibition 2021. 9. 6. 21:53

21세기가 도래한지도 20. 어느덧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종이의 존재를 점차 잊고 있다. 15년전만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들고 신문을 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이란 무슨 의미일까.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는 21세기의 종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하는 공간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컴퓨터를 배우기는 했지만 대개 종이책을 본 세대로서 종이가 아주 익숙하다. 이러한 종이의 역사는 생각보다는 짧다. 서기 105년에 중국에서 채륜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종이기술도 같이 들어왔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이 375년정도라고 한다.

종이의 역사는 그렇다치고 종이와 원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전혀 몰랐는데 원주가 한지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우선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원주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게다가 원주는 조선시대부터 강원감영이 있었는데 종이의 수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지를 만드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현대에는 한지공장도 많았다고 하는데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서 지금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 나는 한지와 종이와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한지는 종이의 한종류이다. 그런데 한지는 우리나라종이라는 뜻으로 닥나무를 주재료로 물과 닥풀을 혼합하여 한지발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손으로 떠낸 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 사무 A4용지와는 다른 질감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물론 원주가 한지로 유명하다지만 다른 곳도 충분히 한지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지와 다른 특징으로는 원주한지는 공예품에 적합하다고 한다. 심지어 종이인데 700년 넘게 보관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점이 21세기 종이의 중요성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종이는 실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기 보다는 예술적인 의미로 더 사용될 것이다. 종이는 다른 재료와는 다른 종이만의 독특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십분활용하여 예술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는 종이의 역사와 한지를 제작하는 것에 대해 전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한지를 주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시간관계상 아쉽게 전시만 보았지만 한지공예 체험활동이 있었다. 또한 현장에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체험키트도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지아카데미라고 해서 여러 수업도 있었는데 이것은 여러번 하기 때문에 원주에 사는 사람들이 하기에 적합할 것 같다. 이러한 다채로운 행사가 종이가 한물간 매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살아있는 매력적인 존재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한지테마파크는 한지개발원이라는 사단법인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한지테마파크를 운영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한지에 대한 연구와 교류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한지대전을 개최한다든지, 한지활성화 전문인력을 양성한다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 한지가 대단히 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한지와 같이 우리의 문화가 담겨있는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우리는 한지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거니와 한지가 있는지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업은 중요하다.

이러한 매력적인 활동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름이다. 물론 요즈음 세계공용어인 영어를 쓰는 것이 낯설지는 않다. 그런데 왠지 한지라면 테마파크라는 이름보다는 다른 예쁜 우리나라 말을 썼으면 어떠했을 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테마파크라고 하니까 뭔가 탈 것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도 용어가 부적합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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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박물관 마을>

Exhibition 2021. 7. 15. 20:26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지금까지 건물 안에만 있었던 박물관이라는 개념을 뒤집은 신선한 박물관이다. 물론 돈의문 박물관 마을도 실내 전시가 있다. 하지만 그 실내 전시건물 사이에 예전 건물을 살려두어 공간이 주는 기억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예전 그 시절을 실제로 지냈던 분들에게는 회상을 그 시절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공감각적으로 그 때 그 시절이 어떠했을지 이해하게 해준다.

우선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이해하려면 돈의문부터 알아야 한다. 돈의문을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탠데 돈의문의 다른 말은 서대문이다. 1396년 돈의문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후 1422년에 정동사거리에 새롭게 조성되었고 그 때부터 새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문 안쪽 동네를 새문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1915년 일본이 도로 확장을 이후로 돈의문을 아예 철거해 버렸다. 그래서 돈의문만 이제 형체없이 이야기로만 남겨진 문이 되었다.

이 새문안은 세월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지나갔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 동네가 과외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마치 지금의 대치동처럼 말이다. 경복고나 이화여고처럼 지금도 그 동네에 있는 학교부터 지금은 강남으로 내려왔지만 당시에는 이 동네에 있었던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등 많은 명문고등학교가 있어서 과외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과 그 때 대학진학율도 다르고 그 때의 명문고는 대부분은 평준화되어 일반고가 되었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다르지 않은 것은 교육열이다. 교육이 사회적 신분을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가고 과외금지령이 떨어지면서 이 동네의 분위기도 바뀌어 동네식당을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민국 사교육의 1번지인 대치동이 맛집타운으로 바뀐 느낌이랄까. 사실 지금 강남8학군에 좋은 학교가 많지만 사실 그 학교가 좋다기보다는 그 동네 사는 사람이 잘 살아서 좋아진 것이어서 새문안과는 다를 수 있겠다. 지금도 각종 특목고는 강남에 없다. 돈의문 박물관 거리를 걸으면서 대치동의 미래를 한 번 그려본다.

시간이 또 흘러 2003년 이 동네는 점점 낙후해졌는데 이 지역이 돈의문 뉴타운으로 지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원안에 따르면 이 동네는 공원으로 바뀔 계획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 공원으로 바꾸지 않고 동네 자체를 그대로 두고 박물관화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다. 물론 지금은 여기에 직접 주민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흔적도 남기고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래서 새문안은 새롭게 태어났다.

박물관에 여러 전시실이 있는 것처럼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도 여러 관람 포인트가 있다. ‘돈의문역사관’, ‘삼대가옥’, ‘돈의문구락부’, ‘생활사전시관’, ‘서울미래유산관’, ‘시민갤러리’, ‘작가갤러리’, ‘돈의문체험관’, ‘서울도시재생이야기관’, ‘기획전시’, ‘스코필드기념관’, ‘명인갤러리등 크고 작은 전시실 들이 있다. 옛것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워낙 잘 리모델링해서 전혀 더럽거나 불쾌하지 않다(아이러니 한 것은 옛것을 그대로 살리려 하면 쿰쿰하고 어두운 면도 그대로 보여져야 하는 데 그것이 쉽지는 않다). 박물관 마을을 어슬렁 거리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맛이 제대로다. 가끔 진짜 사람이 거주하는 벽화마을 같은 곳에서 어슬렁거리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불쾌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걱정없이 마음대로 사진도 찍어도 좋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 물론 모든 박물관을 박물관 마을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시마다 이 정도의 박물관 마을을 하나 정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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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청주>

Exhibition 2021. 7. 14. 23:31

우리나라의 수도권 밀집현상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다. 지방균형발전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꾸준히 수도권으로 모여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문화시설이 수도권에 몰려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에는 문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었다. 그저 호구지책에 신경을 썼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정도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문화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수요를 채워주는 시설이 대부분 수도권에 쏠여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 사는 것이 삶의 메리트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두메산골에서도 시간을 내서 서울로 문화를 감상하기 위해서 상경하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문화는 생활속에 가까이 있어서 더 잘 즐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삶의 질이 더 올라가게 된다. 삶의 질이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원초적인 욕구다. 그러므로 문화시설이 잘 구비된 곳으로 이사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점은 국토균형발전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청주는 충청북도의 간판도시로 경부고속도로 인근에 위치해 있어서 서울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달리면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LG생활건강이나 SK반도체 공장 등 여러 기업체가 들어와 있어서 경제활동이 왕성한 곳이다. 그런데 메가도시로 성장이 안되는 이유가 문화적인 면이 좀 부족했다. 물론 청주는 직지의 도시라는 이름을 밀고 있다. 직지란직지심체요절의 줄임말로 흥덕사에서 1377년에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로 책을 제작한 것이다. 그만큼이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책이 분명히 중요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유산이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이 직지를 읽고 다니지는 않는다. 서울 사람이 보기에는 청주의 문화시설은 택도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살기는 좋은 데 매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미술관의 개관은 청주에서 살아야할 이유를 하나 더했다.

현대미술관 청주분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시시설은 수장고(우리나라 최초 개방형 수장고라고 한다). 수장고의 사전적 의미는 '귀중한 것을 고이 간직하는 창고'이라고 하는데 박물관, 미술관 전시실에서 일정 기간 노출된 유물이 보관되는 곳으로 항온, 항습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반인의 눈에는 예술작품들의 창고같다. 그래서 그동안 아름답게 전시되어야만 할 것 같은 예술작품들이 수두룩하게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일반 전시시설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 시설이 더 호기심이 가는 것은 원래 건물이 연초제조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에서 담배를 가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4년에 공장이 가동 중단되었고 급속히 동네가 쇠락해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재생사업으로 현대미술관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선도사업으로 선정되어 문화제조당도 들어오게되었다. 이렇게 죽어가는 도시에 예술의 혼이 들어오니 지역의 활기가 돌아왔다.

가끔 예술이 우리의 삶에 무슨 관계가 있을 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당장 문화예술이 없더라도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예술이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퇴근 후에 보는 티비 드라마부터 길거리에서 잠시 관심을 줄 수 있는 조각상까지 모두 문화예술이 녹아들어있다. 이 문화예술이 칙칙한 사회를 생기있게 해준다. 물론 BTS나 봉준호 같은 거물의 업적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힘들 때 흥얼거리는 유행가부터 인생을 큰 감명을 주는 예술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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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the Brick>

Exhibition 2021. 7. 3. 23:49

Nathan Sawaya 작가의 The Art of the brick은 레고를 예술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레고하면 한때는 아이들의 두뇌발달촉진을 이끄는 장난감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근래에는 레고를 즐기는 어른들도 많이 늘어났고 이제 레고는 어린이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낫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 이제 예술로 넘어간 경지를 네이슨 사와야는 보여주었다. 입장할 때는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들어나고 나서 이 사람은 정말 아티스트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 면에서 놀랍다. 첫 번째는 레고를 통해서 표현해내는 작품 자체의 예술성이다. 흔히 레고라고 하면 매뉴얼대로 레고를 조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분은 매뉴얼을 전혀 없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레고라는 도구로 표현해낸다. 그의 대표작으로 사람이 가슴을 뜯어내는 조각이 있는데 인간의 고통을 정말 잘 구현해 내었다. 레고라는 독특한 질감이 더 가슴에 와닿게 하였다.

그의 원천적인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만약에 그 아이디어만 본다면 굳이 전시회 장에 갈 필요가 없다. 도록을 보거나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아 그렇구나하는 식으로 감상하면 된다. 그런데 전시회에 꼭 가야하는 이유는 실물이 주는 경외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들이 큼직큼직하다. 실물로 보면 이런 것을 직접 혼자 만들었다는 것에 박수가 저절로 나온다. 나는 메이킹 필름을 보았는데 정말 노동 그 자체이다. 그리고 실물로 주는 감동이 확실히 있었다. 만약에 내가 그 저 인터넷으로만 보았다면 이 정도의 감동을 못느꼈을 것이다.

작품 외에 신기했던 점은 작가의 걸어온 길이다. 원래 사와야는 변호사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변호사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고 예술가에 비해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있어서는 훨씬 용이하다. 성실하게 살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대단한 로펌에 가서 엄청난 금액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지장이 없이 살 수 있다. 인문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그런데 취미로만 했었던 레고 예술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아예 그만 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변호사를 그만둔 결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는 레고 예술가(지금도 생소하다)라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 일에 대해 진심이었던 것 같다. 변호사일로 인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레고 작품에 쏟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정말 싫었던 것이다. 그 정도도는 되어야지 멀쩡한 직업을 그만둘 수 있는 결단이 생길 것 같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두둑했던 것 같다. 변호사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는데 레고 아티스트요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들의 신경을 썼다면 도무지 변호사를 그만두고 레고 아티스트를 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해석은 아마도 그가 매우 잘 사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었을 까하는 추측이다. 만약에 그가 유산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일을 안할 정도로 부유하다면 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레고 작품을 만드는 데에도 꽤나 비용이 들어가는데 각종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이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고 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라는 확실한 생업을 저버리고 레고 아티스트를 할 정도라면 경제력이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에 이 추측이 맞다면 꼭 예술이 배고파야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의식주 생활에 걱정이 없을 때 더 독특한 시도를 해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만하더라도 큰 근심없이 시간이 많을 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근본 이유야 그렇다치고 확실히 사와야는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높은 수준으로 구축하였다. 그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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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Exhibition 2021. 7. 2. 01:56

남대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숭례문이 양방향으로 개방되어 다녀와보았다. 생각해보니 숭례문을 직접 지나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20082월 어처구니 없는 방화사건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벌써 13년 전 일이다. 2013년에 복구공사를 다마쳤고 그동안 정문만 열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숭례문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 모르고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숭례문은 1396년 태조 5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398년 태조 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신을 마중하고 배우하는 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할 때도 관료들이 숭례문에서 전송하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통금시간이 있어서 통금시간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종이나 북으로 성문을 여닫는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차 서울이 팽창하며 근대 도시화되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의례적 기능은 사멸되었다. 심지어 1899년에는 숭례문 아래로 전차가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이후에는 주위로 도로가 지나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는 내부로 진입되지 못하게 되었고 숭례문에 주변 도로에 둘러쌓인 형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의 모습이 지금까지 느낌으로 남아있어서 가끔 애국가같은 것을 볼 때, 남대문을 주위로 여러 차들이 지나다는 것을 멋있게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숭례문을 사람들과는 떨어진 존재로 만들어낸 것 같다. 지금도 길을 건너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앞뒤로 들어갈 수 있어서 그 숨통이 조금은 트인 것 같다.

숭례문이 우리 국민의 제1의 문화재로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국보1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숭례문은 국보1호의 위치에서 내려(?)온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국보는 334, 그리고 보물은 2110호까지 있다고 한다. 문제는 국보 1호라고 함은 행정적인 의미에서 1, 2호라고 지은 것이지 숭례문이 국보 2(원각사지 10층석탑)보다 더 중요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334개 모두 중요하지 숭례문이 국보 챔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이참에 아예 번호를 매기는 것을 없애기로 했다.

숭례문이 국보가 1호가 된 것의 유래는 일본이 숭례문을 일제강점기 당시 보물1호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된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는 1962년에 문화재 보호법을 정할 때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정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꼭 숭례문이 왜 국보의 최고자리에 있어야하냐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참에 번호를 제거하여 국보 사이의 서열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국보1호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숭례문을 1호라고 부르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다. 특히 이렇게 국보에 번호를 붙이는 나라가 전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한다. 아마도 얼마 후에는 국보1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기성세대나 늙은 세대라고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국보 1호가 아니더라도 숭례문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수도였고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핵심부에 당당히 자리한 그 모습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더 번창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숭례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방문에서 도심 속의 성이라고 사진 한 장 찍는 곳이 아니라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2008년에 아픔이 있었지만 아픔을 딛고 발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건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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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보로망 삼국지>

Exhibition 2021. 6. 17. 01:51

삼국지가 또다시 태어났다. 삼국지는 기본적으로 한나라가 쇠락해가는 시절부터 새로운 진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시기를 그린 작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역사 중에서 이 시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삼국지라는 작품때문일 것이다. 물론 삼국지가 역사에 기반을 하고 있지만 일단 소설작품이다. 왜냐하면 삼국지를 본격적으로 작품으로 승화시킨 나관중이 이미 원나라 말 때 사람이기 때문이다(정확히 언제 태어나고 죽은지도 잘 모름). 이 때가 1300년때니까 삼국시대가 있었던 시절보다 1000여년 후에 글이 쓰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많은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작품이 된 것이다. 아무리 역사적인 기록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 배경이 된 시대가 200년대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조조가 관우를 포섭하려고 했던 대화를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으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이 삼국지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몇 개의 역사적 사실를 근본으로 두고 다양하게 역사적인 연출이 가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한다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삼국지 정도 때의 일을 응용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허락이 되는 부분이 된다. <누보로망 삼국지>도 현대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삼국지를 재해석한 전시였다. 누보(nouveau)가 프랑스어로 새롭다는 뜻이고 로망(Roman)이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 소설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생각할 때 누보로망은 새롭게 재해석된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시회에서 삼국지의 내용을 배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삼국지를 아는 사람이 와서 재해석된 삼국지를 느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특히 전시회이미로 색다르게 시각화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마치 연애소설처럼 로맨틱하게 그려낸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이런 면에서 삼국지 골수팬들은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삼국지 시대의 실제적인 거리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현대와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골수팬은 아니어서 그런지 이러한 현대적이 시도가 오히려 삼국지의 매력과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삼국지가 나관중 버전 하나로만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는 고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삼국지는 다루어졌다. 글로도 쓰여졌고, 만화로도 그려졌고, 영화로도 촬영되었고 게임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누보로망 삼국지>처럼 전시회로도 만들어졌다. 한가지 원재료로 다채롭게 만들어지면서 작품의 매력도는 더 커진다.

작품의 형태뿐만 아니라 해석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어, 글도 한 사람만이 쓴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이문열씨도 쓰고 김홍신씨도 쓰고 다양한 사람이 이에 대해 썼다. 그리고 다양한 작가가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삼국지를 파악한다. 어떠한 사람은 조조를 빌런으로 어떠한 사람은 그를 영웅으로 그린다. 정답은 없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이 있을 뿐이다. 아마 삼국지가 벌어진 시대가 20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만 되더라도 다양한 시각에는 꽤나 심각한 정치적인 압박이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거의 1900년전 일이기 때문에 아무나 다양하게 해석해도 크게 흠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삼국지의 매력이 된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멋지고, 감각있고, 세련되게 시각화된 삼국지에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는 의미에서 우리나라 여러 작품도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다. 물론 새롭게 태어나다보면 원전을 내용과 의도를 해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조금 오래 전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삼국시대 전의 내용을 각색해서 현대화시킨다면 우리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고 분쟁도 적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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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bag: 에르메스, 가방이야기>

Exhibition 2021. 6. 8. 16:40

나는 가방에 관심이 없다. 일단 검은색에 눈에 띄지 않은 책가방을 메고 다닌다. 한 번 사면 3년정도 쓰는데 가방은 나에게 하나로 족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가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여자들은 대체로 가방에 남자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물론 남자보다 가방에 관심이 덜 한 여자들도 꽤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명품 가방, 특히 옆으로 메거나 들고다니는 종류의 가방에 국한하자면 평균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는 가방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나의 시선은 틀릴 수 있다.

당연히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여자들에게 명품 핸드백은 선망의 대상이다.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등등의 이름은 나같은 패션 문외한도 들어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명품 중 최고봉 중에 하나가 에르메스라고 한다. 이 에르메스에서 에르메스 가방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래서 에르메스 가방에 큰 관심을 갖은 어떠한 여성분과 같이 이 전시회를 학습차원에서 가게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명품일까 배워볼 의도에서 말이다.

나는 이 에르메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창업자인 Thierry Hermes를 따라서 에르메스라고 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에르메스를 허미스(영어식 발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에르메스라고 하는 것은 이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1년에 태어나 1878년에 타계했다고 한다. 그러니 에르메스가 생긴지는 200년이 안된 것이다.

가방의 문외한으로서 전시회를 둘러보고 가장 인상깊게 생각한점은 에르메르 가방에 따로 상표가 붙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샤넬 가방을 보면 그 유명한 로고가 붙어 있고 루이비통은 그 유명한 무늬가 가방을 수놓아서 대번에 그 브랜드의 가방인 줄 식별하겠는데 에르메스의 경우에는 따로 특이한 로고나 무늬가 없어서 신기했다. 동행한 분에게 이 점에 대해서 문의를 해보니 아는 사람은 안다는 것이다. , 에르메스 가방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은 로고나 무늬가 없어도 안다는 것이었다. 에르메스 가방을 착용한 사람은 에르메스를 착용했다고 알아 주지 않는다고 괜찮을 정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르메스에서 간판 상품 중 하나는 버킨 백이라고 한다. 그 위엄이 어느 정도냐면 <뷰티풀 몬스터>라는 책을 쓴 김경씨는 책에서 버킨 백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버킨 백의 명성은 세계의 수많은 직장 여성들이 그 백을 사는 것 필생의 업으로 삼을 만큼 높다. 버킨 백을 사기 위해(혹은 사주기 위해) 적금을 붓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여기에서 버킨은 사람이름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버킨이 사람이라고 하면 가방을 만든 장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Jane Birkin1946년생인 가수이자 배우라고 한다. 이 종합만능 엔터테이너의 이름을 따서 버킨 백이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로 바꾸어 응용하자면 가방을 이름을 엄(정화)가방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전시를 둘러보면서 신기했던 점은 평소에 들고 다니기에는 어려운 것 같은 디자인의 가방도 꽤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슨 상어모양을 가방에 넣었는데, 나같은 가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이 가방의 명품 에르메스라고 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마치 자동차 회사에 실제로 시장에는 내놓지는 않았지만 한번 구상해보는 컨셉트 카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모양의 가방도 있었는데 실제로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 전시회에 온 많은 사람들은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가방을 사진을 찍고 가방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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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Exhibition 2021. 6. 8. 00:46

나는 가끔 삶이 힘들 때, 독립운동가분들의 기념관을 찾는다. 독립운동가분들의 고초를 보면 내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지 되뭍게 된다. 나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의 부질없는 사리사욕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양재에 있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과>도 나의 옹졸함을 깨우쳐 주었다.

내가 기념관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윤봉길 의사께서 25살에 거사를 치르셨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의사님께서 30대 중반 정도에 의거를 일으키신 줄 알았다. 2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불태워 나라의 정체성을 확인시킨 것이었다. 내가 25세에 기껏해야 제대해서 학점관리하느라 정신없었던 것을 기억하면 부끄러워 진다.

윤의사님께서는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돌아가셨다. 의사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있었고 1910년에 경술국치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태어나실 때부터 아예 나라가 패망해버린 것이다. 의사님께서 12세였던 1919년에 3.1운동이 있었다. 아마 이 사건은 의사님의 어린날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의사님은 가정교육을 잘 받으신 것 같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망해있고 가정이 엉망이면 그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비분강개하셔서 독립운동을 결심하셨으니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힘들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윤의사님 연배의 우리나라 조상님을 생각해보면 극한의 어려움에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의사님의 걸어온 길을 보면서 그 전에는 몰라서 가장 놀란 점은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기준으로 15세에 결혼하신 것도 놀랍고 25세가 되시기 전에 3명의 자녀를 둔 것은 아주 놀랄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다. 내가 이것보다 인상깊게 보았던 점은 아이가 있는데도 독립운동을 감행하신 것이다. 사실 아이가 있으면 현실에 부조리한 점이 있더라도 꾹 참고 살기 마련이다. 아이를 두고 그 부조리를 고치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큰 희생을 일으킨다. 만약에 의사님이 싱글인데 거사를 일으켰다면 그나마 조금이나마 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만하다. 그런데 아이가 3명이나 있는데 거사를 일으킨 것을 보고 이 분은 초인적인 신념으로 거사를 일으켰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윤의사님이 남자로서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는 점이다. 이 말의 뜻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가끔 남자답다고 하는 것이 객기를 잘 부리를 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남자답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은 오히려 남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좋은 의미로 남자답다고 하는 것은 의로운 뜻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연한 각오를 가지고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의사님은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멋진 남자로서도 본받을 만하다.

2021년에 세상은 의사님이 사는 세상과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의로운 뜻을 세울 곳은 지금도 아직 많다. 의로운 뜻을 세우는 일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 만약에 윤의사님이 그저 3명의 자녀를 키우는데 급급하여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는 조선인으로 살았다면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일상의 무게에 삶이 옹졸해짐을 느낀다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가는 것을 추천하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자신이 둘러싼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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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louse-Lautrec 전>

Exhibition 2020. 3. 11. 21:27

Toulouse-Lautrec 전 Henri de Toulouse-Lautrec는 1864년에 태어나 1901년에 죽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대중에게 기억이 남는 것은 그가 물랑루즈 같은 곳에서 하는 공연을 그린 포스터이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가수 Aristide Bruant의 공연을 그린 포스터이다. 이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잘 그렸다는 생각보다는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을 먼저하게 된다. 잘 그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하게 되는 개념은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이다. 사람이 보는 그대로 근접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잘 그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능력은 사진기의 출현으로 그 능력의 가치가 떨어졌다. (물론 아직도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보면 잘 그렸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고, 그들의 능력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사진기 이후의 잘 그렸다는 것은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해도 사진기보다 못하니 차라리 스타일있게 그리는 것이 잘 그린다는 개념이 잡힌 것이다. 예를 들어, 모네의 풍경화를 보면 사진의 수련과는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이를 보고 못그렸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실제와 동일한 수련을 보는 것보다 다르고 깊은 느낌을 전해준다. 이 지점에서 예술은 탄생한다. 이제는 사진기가 줄 수 없는 작가의 그림체에서 사람들은 독특한 감동을 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론 습작에 있어서 현실과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모르겠지만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고 화가 자신의 혼을 녹여내서 그리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이 후의 작가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예술가로 입지를 다지려면 다른 예술가와 달라야 한다. 다른 작가와 비슷하다면 그저 아류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가 되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화가에 국한에서 말하자면 이제는 더 이상 현실을 현실처럼 묘사할 필요는 없으나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기 출현이후에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고 후예의 화가들은 적어도 선배 작가들의 스타일을 참고는 하되 다르게 현실을 표현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이 말은 쉽지 현실에서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이 공부를 하다보면 예전 것을 참고하게 되는 데 그러다보면 비슷한 성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만 비슷해도 이것은 피카소 스타일이네, 이것은 고흐 스타일이네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후예의 예술가들에게는 모욕스러운 말이 되겠다. Henri de Toulouse-Lautrec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사람이다. 전시회에 가서 그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한 스타일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독특한 스타일이 그가 죽은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그의 이름이 남겨져 현재 대한민국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돈을 더 벌었을 지언정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오롯히 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화가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은 어쩌면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스타일이 세상의 인정을 받으면 상당한 수입을 기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기리 남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생활고에 피폐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카소는 살아 생전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그의 스타일은 그의 이름을 따게 되었다. 반면에 고흐는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살았을 때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예술인으로 거듭나게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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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하수도과학관>

Exhibition 2019. 12. 21. 14:07

나는 하루 한번 이상 대변을 본다. 그리고 3차례 이상 소변을 본다. 이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활동이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 인간이라면 배출은 필수적인 활동이다. 문제는 이 배출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이다. 아무리 향긋한 음식을 먹더라도 나오는 배출물은 어김없이 냄새가 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5000만명이 배변을 매일같이 하는데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다행히 이를 잘 처리해주는 하수도가 있어서 다행이다. <서울하수도 박물관>은 어떻게 오폐수가 걸러져서 깨끗한 물로 재탄생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서울하수도 과학관>은 장한평역 근처에 있다. 그런데 장한평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거리는 크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 찾기가 은근히 어렵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이용객을 나르고 있다. 옆에 있는 서울새활용센터와 함께 있기에 무료인 셔틀버스를 타면 새활용센터와 하수도박물관을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과학관은 일단 상하수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도 사람들은 배설하고, 세탁을 했으며, 설거지 등을 했으므로 생활하수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관리되지는 못했다. 가끔 현대의 환경오염을 이야기를 종종한다. 그런데 어쩌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환경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수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생활하수를 그대로 버렸다. 나는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환타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면 다 좋았을 것이라는 환상 말이다. 과거 서울의 청계천에서 사람들은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고 오줌도 누고 했다. 내가 생각하건데 하수처리가 안된 청계천은 정말 더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전의 청계천은 맑은 물이 저절로 흐르는 곳이라고 여긴다. 예전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아주 짧았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더러운 생활용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 하수도가 생긴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전시관에서 예전에도 하수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 하수도가 사실 별로 없었고 아주 원초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전시의 느낌은 마치 예전 우리의 선조는 일찍이 하수시설의 중요성을 알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나는 과거를 미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미화가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빈번하게 잊게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지금은 녹물이 조금만 나와도 화를 버럭 낼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녹물만도 못한 물로 생활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전시가 있었으면 하다.

그렇다고 현재를 찬양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현재 서울 하수도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배출하는 오수가 잘 처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의 과제도 많이 다루어야 한다. 특히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수 시스템이 발전할 수 있을 지를 그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하수처리는 정부에서 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이다. 이 부분은 민영화되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수익을 창출해보겠다고 하수서비스를 민영화시키면 일반 시민의 삶은 아주 피폐해질 것이다. 하수처리는 경제성장과는 달라서 하수처리를 잘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반면에 잘못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면에서 국방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국방의 경우에도 전쟁을 스스로 일으키지 않는 한 잘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문제는 시민들이 이러한 정부성과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시민들이 정부를 신뢰할 때, 정부성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하수도 같은 성과는 잘 반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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