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문학관>

Exhibition 2019. 1. 5. 19:40

ㅡㄴ대

인천역 근처에는 볼거리가 많이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근대문학관>이다. 혹자는 문학을 읽으면 되지 웬 문학관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학을 읽어서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문학을 통해서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고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문학관을 통해서 어떻게 문학이 변천해왔는지 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작가의 삶도 중요한 연구거리이다. 작가를 이해하면 작가가 쓴 문학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어떠한 배경으로 작가가 집필하게 되었는지를 알 고 작가의 삶을 고려보는 일은 그 자체도 흥미로운 일이다.


일단 외관이 아주 세련되었다. 겉창에는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의 글귀가 적혀있는데 꽤 근사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건물색도 너무 튀지도 튀지 않지도 않게 되어있다. 예전에 항구의 창고로 쓰이는 건물을 리모델링했다고 하는데 아주 현대적으로 잘했다. 그래서인지 한국문화건축대상 우수상도 수상하였다는데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겉뿐만 아니라 안도 세련되게 잘 꾸며놓았다. 그래서 전시내용도 중요하지만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을 보는 것도 상당한 감상 포인트가 되었다.


전시관은 기본적으로 상설전시,’ ‘기획전시,’ ‘작은전시로 나누어져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상설전시는 대한제국 때부터 광복 후 미군정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후는 현대로 생각하여 특별히 전시하지는 않았다. 1885년부터 1948년은 우리에게는 고난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시기였다. 조선왕조의 국운은 점차 떨어져가고 외세의 영향은 점차 커진다. 그리고 191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그 후 35년의 슬픔의 시절을 끝내고 광복을 맞이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고 나라는 신탁, 반탁 운동의 갈등으로 점철된다. 이러한 시기의 문학은 어떠했는지 <근대문학관>은 시대별로 잘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쪽에서는 저항문학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하지만 모두가 저항만 외치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절이 무려 35년이나 되다보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도 많았다. 식민지 시절에서도 사람들은 사랑도 하고, 애도 낳고, 양육도 하고, 혹자는 일본으로 이민 혹은 유학도 갔고 다양한 삶을 살았다. 인간의 삶의 폭만큼이나 문학의 범위는 광대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저항을 그린 문학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문학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좋은날>은 인력거를 모는 사람의 삶의 고단함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일제에 대한 저항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근대문학관>은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무언 가를 전시를 하려면 그를 뒷받침이 되는 연구활동이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근대문학관>은 꾸준히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기획전시를 하기 위해서 연구활동이 필요하고 전시를 통해 연구물이 대중에게 소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도 <한국근대문학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문학이 있는 저녁>, <인문학이 있는 저녁>, <교양이 있는 저녁> , 저녁이 있는 시리즈로 시민들을 찾아가고 있다. 평일오전오후는 평범한 사람들은 강연에 참여하기 어렵다. 그래서 문학관에서 퇴근하고도 시민들이 와서 들을 수 있도록 저녁에 강연회를 연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더 다양하고 의미있는 강연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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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서관>

Exhibition 2019. 1. 2. 22:36


미국에는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 대통령 도서관을 종종 세운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도서관은 아니고 대통령이 이루어 놓은 업적 등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 도서관이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많은 대통령이 불행하게 말로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으로 퇴출되어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냈고,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에 의해 추출되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후 최규하 대통령은 또다시 군부의 전두환 12. 12 쿠데타로 인하여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내란되 및 비자금 은닉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퇴출되지는 않았지만 임기 말에 찾아온 소위 IMF위기라고 불리는 외환위기로 인하여 그의 평가는 아주 좋지 못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소환된 이후에 자살을 했다. 그 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각종 혐의를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 중 불행한 운명을 처하지 않은 대통령은 지금까지 김대중 대통령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보면 우리나라가 지난 반세기 얼마나 역동적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도서관>을 보면 김대중이라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일본 강점기부터 돌아가신 2009년까지의 상황 역시 잘 알 수 있다.


연세대학교의 부속기관 중 하나인 <김대중도서관>은 총 5층에 지하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관람객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은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 1층과 2층이다. 1층은 상설전시관으로서 연대별로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전시해놓았다. 1925년생이시니까 성인이 되었을 즈음에 광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에 입문하여 삶을 사시는 데 그 당시의 상황상 녹녹치 않았다. 그가 민주투사 확연하게 들어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쉽게 진후 1973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어서 살해당할 뻔 한일이 있으면서이다.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한 1972년 있었던 유신헌법을 반대하면서 탄압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저항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을 탠데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민주화 세력의 동력을 잃지 않게 노력을 한다. <김대중도서관>에는 이에 대한 서신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의 인생이 인동초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 또다시 들어온 전두환 정권 때문일 것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조금 상황이 좋아질까 했었던 우리나라 사회에 전두환 군부정권은 또다시 암흑의 시대를 열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어렵사리 얻은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에서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의 당선은 또다시 아픔이었을 것이다. 이 모두 세월을 뒤로하고 오랜 시간 후에 19982월 대통령을 취임하였을 때 아주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은 초심을 잃지 않으셨다.


아마도 취임초기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낙후된 인권상황을 개선하는데 힘쓰고 남북간 관계를 평화의 관계로 바꾸는데 큰 힘을 쏟으셨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신도 아니고 완벽한 대통령도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대통령 중에서는 훗날에도 추앙받아야할 만 대통령임에는 분명하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보는 것은 자신이 최고의 권력에 올랐을 때 지난 날 자신의 겪었던 어려움을 잊지 않고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은 권력에 취해서 지난 날 왜 자신이 정치를 하는 지를 잊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대중도서관>은 신촌에 있다. 홍대나 신촌에 갈 일이 있을 때 한번즈음 들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도 음미하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자신이 뜻하는 바가 잘 되지 않을 때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다면 이곳에 와서 그 분의 생애를 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대통령들이 자신의 도서관이 세워 질 정도로 업적을 남기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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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유-박찬호 특별전 Overcome yourself>

Exhibition 2019. 1. 2. 02:22

박찬호. 그는 우리나라 야구 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이다. IMF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 1호 메이저리그 선수로서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국가대표로서 우리나라 야구를 드높였다. 이러한 그가 근래에는 투머치 토커로서 예능에도 출연하고 있지만 그는 대한민국 대표야구선수이다. 이러한 그의 족적을 그린 <Overcome yourself> 전시회가 강남정보관광센터에서 열렸다.


<Overcome yourself>라는 제목이 낯간지러울 수 있겠지만 그가 투머치 토커로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야구선수가 있다. 그 중에서 프로야구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 메이저 리그선수가 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결과로 입증받는 메이저 리그에서 FA조건을 얻을 정도로 오랫동안 활동한 선수는 손에 꼽는다. 물론 박찬호선수가 텍사스로 이적한 후의 성적은 처참하지만 그가 LA에서 보여주었던 성과는 세계의 야구선수들 중의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값진 결과이다. 이러한 성과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노력을 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노력을 하는 것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노력이 모두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때로는 운이 좋지 않거나, 때로는 같은 선수의 실책으로, 때로는 상대편이 너무 강해서 무너질 때도 있다. 이럴 때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한단계 올라서야 대단한 선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Overcome yourself>는 적당한 제목인 것 같다.


이 전시회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품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박찬호 선수가 사용했던 여러 유니폼이나 물품이다. 그리고 둘째는 박찬호선수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김동유 작가의 박찬호 그림이다. 박찬호선수가 입었던 LA 다져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한화 이글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국가대표 유니폼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지나온 땀의 기억들이 잘 보존된 느낌이다. 그가 지나왔던 화려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길을 보면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가하는 생각을 했다. 항상 잘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고 울퉁불퉁하지만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닦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져지 위에는 동료들의 싸인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역시 살아가면서 혼자 하는 일은 많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게 되는데 일을 할 때의 동료들은 때로는 짐이 되고 때로는 힘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료없이 큰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람관계 속에 우리는 삶을 구성한다. 져지의 위에 있는 싸인들이 주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김동유 작가의 박찬호 초상화는 아주 인상적이다. 멀리서보면 박찬호 야구선수인생 말년인 한화이글스의 모자를 쓴 박찬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박찬호 선수의 LA 다져스 시절 젊은 박찬호의 모습이 보인다. 꼼꼼하게 작은 LA 박찬호들이 모여서 한화의 박찬호가 되는 구조인 것이다. 생각보다 뭉클한 구조였다. 지금의 전설의 박찬호가 되기위해서는 고뇌하는 젊은 박찬호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돈걱정 없고, 진로걱정 없는 박찬호지만 한때는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영어가 짧은 첫 메이저리거 한국인시절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고민없이 전설적인 위치에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스포츠나 연예계야 30세가 되기도 전에 전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라고해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 단련되면서 성숙한다. 젊음과 성과()를 동시에 움켜지면 좋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김동유 작가의 작품은 젊음이 쌓여서 노련함을 산출됨을 보여준 것 같아 감탄했다. 더욱 감탄한 것은, 특히 작은 박찬호 모습도, 손수 일일이 그렸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그리면서 더욱 더 이 작품이 빛이 나는 것 같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짧게 보았지만 큰 감동이 있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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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박물관>

Exhibition 2018. 12. 29. 22:44

인천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짜장면 박물관>에 다녀왔다. 우리가 늘상 먹는 짜장면에 대한 국내 유일한 박물관으로 천원이면 입장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워낙 사랑을 받고 중국에서 오히려 인기가 많지 않아 도리어 한국음식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의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다. 방송에서는 자장면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인간적으로 장면이라고 불러야 제맛이다. 그러면에서 <짜장면 박물관>이 자장면 박물관이 아님을 감사한다.


<짜장면 박물관>의 건물은 예전에 짜장면을 최초로 수입하여 만든 공화춘 건물이라고 한다. 이 공화춘의 이름의 유래가 독특하다. 원래 이름은 산동회관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해혁명이후 1911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공화국을 표방한 중화민국을 따라서 共和를 붙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춘()을 따서 공화춘(共和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공화춘의 유래에서 보면 알수 있듯이 우리가 짜장면을 먹어온 역사는 생각보다는 길지 않다. 기껏해야 100년이 된 것이다. 100년 만에 우리가 사랑하는 대표음식이 된 것이다. 나의 고조할아버지께서는 이 짜장면을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3~4세대 만에 탄탄한 입지를 얻은 음식이 되는 것을 보면 22세기에는 어떠한 음식이 우리나라화되어 식탁에 오를지 궁금하기도 하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은 우선 어떻게 짜장면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설명한다. 이 때 화교의 역할을 이야기하는데 중국 산동성의 동쪽끝의 경우에는 인천과 불과 500km도 거리가 채 되지 않는다. 이는 거의 서울과 부산의 거리정도 되는데 배를 타야했지만 인천과 중국 산동사이의 교류는 그 어느 곳보다 활발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는 한국에 자리잡고 살면서 그들이 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짜장면이고 이 짜장면이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 우리의 입맛에 맞는 짜장면으로 진화한 것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제3전시실의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을 재현한 곳이었다. 1930년의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강제로 지배받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인천에서 중국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은 우리나라 사람, 중국사람, 그리고 일본사람에 어떠한 의미였을까 상상해본다. 동북아시아에서 한중일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정말 친밀하면서도 멀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싸우는 관계가 아마도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4전시실에서는 드높아진 짜장면의 인기가 나온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부모님 세대분들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입학식이나 졸업식 후에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 어떠한 관례라고 하였다. 그만큼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중국집도 고급과 일반 대중식당으로 점차 분화되고, 짜장면은 봉지라면화되기도 하여 우리가 아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짜장면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짜장면의 100년의 역사는 물론이거나와 흘러온 우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짜장면 박물관>은 인천광역시 중구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중구시설관리공단은 <짜장면 박물관>뿐만 아니라 <한중문화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장>, <인천개항박물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짜장면 박물관>은 박물관이라는 특성상 짜장면만큼 수익이 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수익에 덜 민감한 공단에서 공화춘건물을 잘 탈바꿈하여 관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약간 아이디어가 있다면 작게 공화춘의 예전 요리법으로 짜장면을 직접 팔면 어떨까한다. 물론 <짜장면 박물관>근처에 <수요미식회>에도 소개된 여러 출중한 중국식당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 공화춘 건물에서 먹는 짜장면은 또다른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오리지널 레시피가 아직 전수되어 있다면 그 맛도 보존할 가치가 충분함으로 그것을 직접 판매함으로써 사람들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어떨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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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 겔럭시 오디세이>

Exhibition 2018. 12. 29. 03:21


유년시절의 기억을 관통한 여러 만화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은하철도 999>이다. 전체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강렬한 이미지와 노래는 뇌리에 박혀서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은하철도 999><Galaxy Odyssey-松本零士의 오래된 미래>라는 이름의 전시회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전시회는 용산 나진상가에서 열렸다. 장소부터가 아주 적합했다. 이제는 위세를 조금 잃었지만 한때 용산은 전자계열의 메카로서 활약해왔다. 공상과학 만화인 <은하철도 999>에 딱 맞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나진상가의 한 부분은 막아놓고 예전의 가게로 사용되는 공간들을 섹션으로 사용하여 관람할 수 있게 하였는데 매우 신선하면서 좋았다. 전시회에는 총 20개정도의 섹션이 있었고 그 섹션마다 다양한 전시가 펼쳐져 있었다.


다양한 전시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만큼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의 작가인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뿐만 아니라 가수 하림, 만화가 탐이부, 과학예술가(지금은 미디어 아티스트) 송호준 등 많은 작가들이 <은하철도 999>를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했다. 작가의 배경이 다르고 <은하철도 999>를 보고 느낀 바도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이 나왔다.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메텔, 철이의 옷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이 전시회를 풍성하게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쓰모토 레이지의 작업실이다. 관련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크지 않은 작업실에 문하생과 같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거대한 세계가 새롭게 탄생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은하철도 999>는 이 세상에 없는 그야말로 공상(空想)”과학만화이다. 이렇게 있지도 않은 세계를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주선도 아니고 기차가 은하를 뚫고 움직이는 모습은 이 만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작은 공간에서 잉태되었다는 점에서 창작자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은하철도 999>은 방영된지 꽤 오래된 작품이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소년킹>에 연재되었고 에니메이션으로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후지TV>에서 방영되었다. 에니메이션은 무려 117회 달하는 장편 에니메이션이다. 그만큼 스토리가 튼튼하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또한 방영된지 무려 40년에 가까운 에니메이션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이 만화가 던지고 있는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은하철도 999>는 어린이만 보기에는 상당히 내용이 심오한 에니메이션이다. 예를 들어, 철이는 고생 끝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기계인간의 세계에 도착한다. 그런데 영생을 얻은 기계인간들이 삶이 지겨워져서 자살을 한다. 어른이 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은하철도 999>은 이제 어느덧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은하철도 999>의 인기가 세대를 걸쳐서 있게한 주요 원인중 하나는 역시 메텔이다. 메텔이라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인물이 있기 때문에 <은하철도 999>은 더 공전의 히트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메텔에 영감을 받아서 나온 예술품들도 많았다.

일본의 에니메이션은 상당히 발전되었다. <은하철도 999>는 물론이거나와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등을 비롯한 SF를 비롯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 시리즈, 그리고 대중들이 친근하게 보는 <드레곤볼>, <슬렘덩크>, <나루토>, <원피스>, 등등 셀 수 작품이 쏟아져나왔고 이것들은 각각의 세계를 이루었다. 그래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일본문화의 기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의 만화산업은 일본보다는 뒤떨어져 있지만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웹툰시장은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좀 더 발전해서 <은하철도 999>같은 전시회를 할만한 좋은 우리나라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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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기념관>

Exhibition 2018. 12. 5. 17:11




서래마을에서 9호선을 타기 위해 내려가다가 우연히 <심산 김창숙 기념관>에 들리게 되었다. 반포에 꽤 오랫동안 살았던 나로서는 언제 이런 곳이 생겼는지 의아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은 물론 심산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지만 오로지 기념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서초구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건물에 1층에는 가장 중요한 심산선생님 기념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볍게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북카페가 있다. 지하에는 독서실과 서초창의허브가 있다. 그리고 2층에는 심산아트홀이 있어서 여러 공연을 관람하거나 직접 대관할 수도 있다. 3층에는 심산기념사업회 사무실과 교육실이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주민들과 호흡할 수 있게 기념관을 꾸려놓았다는 점이 좋았다. 간혹 위인의 전시관이라고 해서 너무 전시에만 몰두하다 보면 일반인들과의 괴리가 생기고는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덜 찾게 된다. 그와 달리 심산 기념관은 심산 선생님은 심산 선생님대로 기리고 생활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심산 선생님의 뜻을 실현했다고 본다. 만약에 여러 생활밀착형 시설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심산 선생님에 대해 덜 인지하였을 것이다.


1층에 구비된 심산 전시관은 연대별로 6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역1은 심산 선생님의 연보가 나와있고, 구역2 심산 선생님의 어렸을 시절이 나와있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웠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1879년생이신 선생님의 출생시기를 생각한다면 유학을 주류로서 배우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하다. 물론 지금도 유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글을 배우는 사람은 응당 알아야하는 것이 유학이었다. 선생님이 유학을 배우고 난 후 나라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유학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다. 구역 3에서 본격적으로 선생님이 구국운동을 나선 이야기가 나온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1910년 성명학교를 설립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신다. 이때가 선생님의 20대였을 시기였는데 나라가 빼앗기는 과정을 보는 것을 청년 김창숙을 좌시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구역 4에서는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가 억울하게 식민지배를 받았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셨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일본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분의 결기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식민지배를 끝내고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다. 구역 5에서는 광복 이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을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를 비판하시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으로서 운영한다. 일평생을 나라를 위해서 고민하신 선생님은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시는데 그의 올곧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구역6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은 그렇게 크지는 않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음미하며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다. 구성이 연대별로 잘 되어 있어서 짧은 시간을 통해서 인간 김창숙의 걸어온 길을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실 초입에 영상실이 있다. 이 영상실에서는 심산 선생님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데 이것을 보고 보면 더욱 이해를 빨리 할 수 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많이 남기셨다. 그 중 마음에 걸리는 말씀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현재의 세대는 예전 세대보다 교육의 절대수준이 훨씬 높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알기만하고 그 배움을 바른 길로 옮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상당한 낭비이다. 심산 전시회를 통해 배운 것을 영감삼아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행동을 해보기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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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88>

Exhibition 2018. 12. 5. 17:10



올림픽 공원에 있는 소마미술관(SOMA-Seoul Olympic Museum of Art)에서는 <Post 88>전을 열고 있다. 2018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지 30년이 된 해이다. 이제 서울올림픽때 태어난 사람들도 30살이 되었다. 이 말은 지금의 30대 이하는 살아 생전에 서울올림픽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의 유산은 거대하다. 아직 강남이 완연히 개발되기 전이 1988년 이전에 크게 올림픽 공원을 조성하고 2004년 서울올림픽미술관을 만들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 즐기게 되었다.


올해 소마미술관은 신설된 9호선 한성백제역과 발맞추어 새롭게 2관을 개관하였다. 2관으로 규모가 커진 소마미술관은 단순히 예술품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드로잉 센터를 구비하여 신진작가를 발굴하는데 힘쓰고, 예술아카데미를 통해 일반인들의 문화를 직접 향유할 수 있게 해놓았다. 게다가 관람료도 비교적 낮게 책정해두어서(성인 3천원) 큰 부담없이 전시를 볼 수 있다. 전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미술관에 조성된 여러 조각 작품을 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2018914일부터 2019224일까지 1988년 올림픽 이후를 조망한 것을 주제로 한 <Post 88>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서울올림픽이 있었는지 30년이 되는 해이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이 있었던 해이가도 하다. 물론 하계올림픽보다는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동계올림픽을 치름으로써 우리나라는 하계, 동계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을 모두 주최한 몇 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특히 올해 평창올림픽은 시작 직전까지 고조되었던 남북미간의 갈등을 잘 통합하였다는 점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 정신과 잘 부합하였다. 이런 점에서 <Post 88>전의 개최는 시의적절했다.


<Post 88>전에는 많은 작가들이 참가하였다. 하지만 소마미술관에 전시된 모든 작가의 작품이 <Post 88>전을 위해 준비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들도 있는데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Post 88>전을 위해 그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 중 <Post 88>에 맞게끔 큐레이터들이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과연 이 작품들이 <Post 88>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꽤 있었다. 예를 들어 2, 1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었던 천성명, 최수양, 권오상, 박혜수, 정정주 작가의 작품은 이것이 올림픽과 관련되어 있는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외 2관의 2전시실에 있는 작품들도 올림픽과는 무관해보였다. 아마도 <Post 88>과는 분리된 독립된 작품 같은데 오해를 입은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명확한 구분이 있었더라면 오해의 소지는 줄 것이다.


여러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이동재 작가의 <아이콘_김연아>이다. 김연아 선수가 은퇴한지는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그는 평창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평창올림픽의 마지막 성화주자로서 아름답게 올림픽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올림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위인 김연아를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작은 김연아들사진들을 점묘화처럼 사용해서 김연아를 구현한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다. 확실히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있을 때 모든 작품이 마음이 들 수는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하게 와닿는 작품이 있는데 이번에는 <아이콘_김연아>였다.


<Post 88>에서 가장 주제와 맞았던 것은 서울올림픽의 영광, 평창에서 꽃 피우다라는 통로였다. 우리나라에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올림픽을 유치했고 개최했는지 통로에 잘 전시되어 있다. 이 통로를 지나가면서 보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유치할 올림픽보다 더 큰 국제행사는 없다. 2002년에 우리는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이제 2030년 즈음에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월드컵을 유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평창올림픽이 개최된지 30년이 지난 2048년에는 언제 남북이 분단되었냐는 듯이 지금의 날을 기억하며 전시회가 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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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기념 전시실>

Exhibition 2018. 11. 20. 05:04

영화 <1987>이 인기를 얻었다. 이제 어느덧 1987년은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나도 1987년에 살아서 대한민국에 있었지만 어린이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2018년의 사회 분위기는 박종철 열사같은 분들 덕분에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남영동에 대공분실이 남영역 바로 옆에 위치하였고 지금 박종철 열사 기념관과 경찰인권센터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날씨도 을씨년스러운 날에 대공분실 건물을 찾았는데 날씨에 걸맞게 검은 건물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지금도 음산한 분위기를 내는 어두운 건물인데 30여년 전에 1980년 전두환 정권시절에 이 건물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 지는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우선 떨리는 마음으로 정문에 있는 안내실에 가서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적고 출입증을 교부받았다. 그리고 문제의 검은색 건물로 들어갔다. 1층에는 경찰청 인권센터 소개실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와 김근태’ ‘박종철로 대변되는 민주화 열사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소개되어있다. 2층은 고객만족모니터 센터, 3층은 성희롱 상담신고센터, 6층은 인권보호담당관실, 그리고 7층은 경찰청 인권교육장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고 4층과 5층을 방문할 수 있다.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고문받았던 5층으로 우선 가보았다. 올라가는데 계단도 있는데 나선형계단이 생긴 만으로도 현기증을 주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5층에는 무슨 고시원마냥 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방마다 민주열사들이 투옥되어서 고문을 받은 것이다.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신 509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리모델링을 해서 전시실처럼 해놓았다. 509호에 들어가보면 간이침대, 변기, 세면대, 그리고 책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31년전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1987114일 박종철 열사는 이 공간에서 물고문으로 숨지고 만다. 얼마나 원통할 지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의 죽음 후,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로 국민의 공분을 사게했다. 그리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87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울분에 찬 일이다. 그나마 그의 죽음이 민주화의 씨앗이 되어 우리나라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음에 그의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고 추앙받을 것이다. 나 같은 후세 사람으로서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5층에서 가장 놀라웠던 일은 복도 끝에 밖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통해서 밖을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남영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남영역은 국철로서 1987년에도 있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분주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모진 고문 속에서 생을 마감한 민주열사들이었다. 전율이 흘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고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를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구조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1987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지는 않은 지 질문해본다.


4층으로 내려와 박종철 열사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마음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국가가 이렇게 한 똑똑하게 평범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1965년생이니까 지금 살아계셨다면 53세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대학을 간 자녀가 있을 법한 나이가 되어서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는 이제 없다.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 이상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국민을 탄압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감시하는 것이다. 헛헛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채 대공분실에서 나오는데 입구의 철문이 유난히 두껍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더 이상 그 철문이 시민과 정부사이를 가로막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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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혼재의 고문헌 사랑: 기탁으로 빛나다>

Exhibition 2018. 11. 12. 02:05

대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도서관 근처에 살았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에는 아무래도 학교와 학원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바람에 근처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용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 간 후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내가 자주이용하기 시작한 2002년 이후로 꾸준히 변해왔다. 가장 큰 변화는 디지털 도서관이 생겼고 그 디지털 도서관 안에 기록 박물관이 생겼다. 근래에는 리모델링을 해서 적어도 자료실은 굉장히 세련되게 바뀌었다. 물론 도서관의 핵심은 책이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전시실도 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튼실한 내용의 전시도 심심찮게 진행되고 있다. 2018104일부터 1125일까지 열리는 <동혼재의 고문헌 사랑>도 볼 만한 전시였다.


동혼재는 지명이 아니라 사람의 호다. 고문헌 전문가 석한남 선생의 호이다. 동혼재 선생님은 생존하시는 분으로서 나이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으시다. 내가 이 분을 직접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데 이렇게 추측했던 것은 그 분의 사진과 결정적으로 그 분이 자신이 모아왔던 소중한 자료 168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생을 모은 것을 기탁하려면 거의 돌아가실 때 즈음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추측했는데 나의 추측은 틀렸다. 그 분의 연세는 올해 59세라고 한다. 동혼재 선생께서는 한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자료를 모아오셨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순화간첩>을 비롯해서 각종 글, 편지 그리고 도장까지 다양하게 기탁을 하셨다.


나는 한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논할 것은 없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탁행위 그 자체였다. 어떤 물품을 기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부문화는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기부하는 사람에 대한 예우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부하는 사람이 꼭 예우를 받기 위해서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예우를 한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이러한 예우는 다른 사람들도 기부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립중앙도서관의 <동혼재의 고문헌 사랑>전은 상당히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게 도서관 한편에 명예의 전당같은 공간을 마련해도 좋을 것이다. 외국에는 뉴욕공립도서관처럼 기부자나 기증자의 이름을 벽에 세기는 경우가 많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통할 것이다.


또한 기증에 대한 행정절차가 손쉽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기증하려고 하는 데 번거로운 행정절차가 있다면 마치 물건을 사는 데 엑티브 X 때문에 구매의욕이 주는 것처럼 기증에 대한 의욕이 감소할 수 있다. 기증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행정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하고 기부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기증자인 동혼재님 외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해평윤씨 장원공파 시조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후손이다. 궁극적으로 조상이 있다. 그 조상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족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족보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 족보에는 시조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조도 누군가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시조의 선조는 왜 족보에 들어가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든다. 시조는 창시자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족보의 대를 끊은 사람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해평윤씨 장원공파 시조인 윤군정씨는 ” “어떻게시조가 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외국인 방송인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할리는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을 하일로 지었고, 스스로 영도하씨의 시조로 하였다. 이런 경우에야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명백한 이유로 시조가 되었으므로 의문이 없다. 그런데 윤군정씨는 어떻게 시조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어느 소속이었으며 왜 시조가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나도 어느 씨의 종파의 시조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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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Pop 전>

Exhibition 2018. 11. 9. 22:41

르 메르디앙 서울-M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Hi, Pop 전을 다녀왔다. 강남역은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최고 핫플레이스로 지난 20년 넘게 자리를 매김 했다. 사실 최고의 핫플레이스의 위치로 올라서는 것도 어렵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압구정 로데오가 최고의 핫플레이스였지만 그 자리를 근처의 가로수길에게 넘겨주었다. 지난 20년간 경리단길, 망원동, 성수동 등 많은 핫플레이스가 생겨났지만 강남역은 최고의 위치를 수성하고 있다.


최고의 위치를 수성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영역확장이다. 원래 2호선 강남역과 뉴욕제과를 근처로 몇몇의 상점으로 시작한 강남역은 근처의 삼성본사가 들어오고 9호선 신논현까지 가세하면서 지역은 성장했다.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의 부차적인 이름은 르메르디앙 호텔(Le Meridien Hotel)이다. 메리어트 호텔계열인 이 호텔의 특징중 하나는 M컨템포러리라는 적당한 크기의 미술관을 구비했다는 점이다. 4성급 이상의 호텔의 경우에는 그 호텔의 세련됨을 중시한다. 단순히 숙박을 한다는 서비스의 개념을 넘어서 그 이상의 세련됨이 있어야 소비자들은 만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M-Contemporary 같은 미술관을 들여온 것은 상당히 영리한 전략이다.


M-Contemporary에서 “Contemporary”라는 단어에 걸맞게 로버트 라우센버그, 키스 해링,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인디애나, 앤디 워홀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제 현대미술도 나이를 먹고 있다. 전시가 된 Robert Rauschenberg(1925~2008), Keith Haring(1958~1990), Andy Warhol(1928~1989), Roy Lichtenstein(1923~1997), Robert Indiana(1928~2018)의 작가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그리고 키스 해링을 제외하고는 모두 20년대 생이다. 만약에 살아계셨다면 90세가 넘는 분들로 이제 현대미술의 초창기 거장들도 이제 한두 세대 전의 인물이 되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여 이 분들이 현대미술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 분들이 청년시대였던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 그전의 미술에 대한 회의감이 야기되어 새롭게 표현하는 방식을 찾았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이다. 그렇지만 시대상은 상당히 중요하다. 최근 웹툰작가들이 인기가 있다. 특히 네이버 웹툰 1세대 작가들이 80년 초중반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가 80년대 초중반 사람들이 청소년이 되고 성년이 될 때 인터넷 시대가 활짝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작가들이 기존 만화가들 밑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기보다 스스로 인터넷에 자신의 만화를 올리고 평가받고 살아남고 번성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상이 일정시대 태어난 웹툰작가가 많아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기존의 가치가 무너졌던 1940년대의 

상황이 새로운 미술유파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한다.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는 저게 미술이야?”라는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점에 있다. 본래 미술이라고 함은 모름지기 붓으로 캔버스에 어떠한 대상을 그려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화가의 노력이 중시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현대미술은 그야말로 날로먹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얼마전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자신이 직접 그리지 않은 그림을 팔아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것도 그림은 화가가 직접 그려한다는 생각에서 발로한다. 좋든 싫든 이제는 과거의 생각은 적어도 미술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림은 화가가 직접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미 사진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는 직접 그리는 것이 무의미해진 시대가 되어 버렸다. 직접 그리는 것보다는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보았던 작가들의 특징은 자신만의 특징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작품을 보고 !!” 엔디 워홀이다 혹은 키스헤링이다라는 생각이 날 정도로 스타일이 확실해야 하다는 것이다. <Hi Pop>은 작가들의 강렬한 존재감을 잘 보여주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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