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엘리엇 <땅콩박사>

Book 2021. 7. 4. 23:00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살았다. 정말 이런 사람이 인간인가 싶은 사람부터 이런 사람이 혹시 신이 아닐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았다. 그 중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중심으로 배우게된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정치인도 있지만 정치인이 아닌 다른 사람도 다양하게 많다. 그리고 잘 몰랐지만 훌륭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좋은 사람을 아는 것 만큼이나 큰 기쁨이다.

나는 <땅콩박사>라는 책을 15여년 전에 아는 분에게 받았다. 그 후 전혀 읽지 않고 15년 넘게 방치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제로 붙은 조지 워싱턴 카버 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조지 워싱턴도 아니고 조지 워싱턴 카버는 처음 듣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나는 내가 참 무식한 사람이었음을 또다시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는 누구인가? 그는 1864년에 태어나 1943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책에도 나와있듯이 그는 노예해방이 되는 해에 태어났다. 물론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공언하기는 했고 남북전쟁에서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군이 전쟁에서 지기는했찌만 실상 갑자기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흑인에게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온 과학자였다.

흑인위인이라고 하면 마틴 루터킹이나 말콤 엑스, 로자 팍스같은 흑인인권운동가가 먼저 떠오른다. 물론 그들이 한 일은 대단하다. 하지만 꼭 인권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위인이 될 수 있다. 조지 카버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특별히 목소리를 내서 흑인의 인권은 드높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묵묵히 걸어온 길이 바로 흑인인권을 개선했다. 예를 들어, 그가 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백인 교수가 거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향학열로 대학교육을 받는다. 그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교육을 받고 연구를 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물론 중간에 단순히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사실 자신의 길을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의 담담한 걸음걸이가 흑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땅콩이 지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시로는 비주류적인 연구를 하는데 흑인이라는 비주류 인종이 비주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을 탠데 정말 대단하다. 연구자라면 한번 즈음 그의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 중의 하는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와서 그런지 그의 신앙에 대해 언급이 나온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사실 신앙의 힘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런데 조지 카버가 걸어온 고난의 길을 보면 아마도 신앙이라는 힘이 그를 버티게 한 것 같다. 각종 말도 안되는 모멸을 겪으면서도 그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인 정신상태로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마틴 루터 킹도 목사였다는 것이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긍정적으로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앞으로도 신앙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해서 개인이나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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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Book 2021. 7. 1. 01:43

정치는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미친다. 정치인이 어떠한 정책을 진행시키고 법을 만드냐에 따라서 사회의 질은 좌지우지된다. 문제는 정치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과정이다. 일단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갈등을 노정하고 봉합하는 과정은 마치 깨끗한 수술이 드문것과 마찬가지로 어렵고 때로는 꺼려지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체계에 따라서 이성적인 숙의가 어려운 것도 정치이기도 하다. 정치뉴스 댓글에 가면 별의별 말도 여과되지 않은 의견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하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숙명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길을 개척하려면 약간의 정치 해설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차분히 읽어볼만 양서이다.

책 제목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이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훨씬 전인 대한민국 건국때부터 이 책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책은 현상태에 이르게 한 우리나라의 여러 중요한 포인트를 잘 정리해두었다. 나는 우리나라만 지금 상태에 이를 때까지 역사적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식민치하를 겪었고, 동족상잔의 아픔도 겪었고, 군부독재도 거쳤다. 이 모든 것 어느 것 하나 극복하는 것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여러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국가도 식민지, 내전, 독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특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대단한 것은 이것을 겪어 내고 선진국 대열에 선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역사적인 전진을 이룩한 것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다.

 

우리 사회가 어떤 영웅적 해결자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사회 심리적 경향은 과도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이는 현실적이고 건전한 대안을 조직하고 제도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255).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대통령제인 우리나라는 아직도 대통령의 권한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인지 시민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상당하다.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기대가 실망을 가져온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누구한명이 바뀌어서 갑자기 선진화를 꿈꾸기 보다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시스템으로 사회가 움직인다는 것이 기득권을 위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에게 납득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나라가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도 더 깊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합의는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니라, 여러 대안들 간의 경쟁을 통해 다수 의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결과를 말한다(251).

 

근래 걱정스러운 부분은 사회적 갈등이 첨예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갈등이 있는 것은 사회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건강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갈등은 병이다. 일단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타인의 생각을 바꿀 생각을 하면 안된다. 일단 인정은 하되 현실적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안을 찾고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갈등이 병적인 수준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은 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갈등을 사회적 합의로 승화시키는 시민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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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 <해방촌의 채식주의자>

Book 2021. 6. 21. 01:34

 

 

나 스스로는 그렇지 않아서 그런지 뻔한 사람보다는 독특한 사람이 매력이 있다. 독특하다라는 점에서 전범선은 아주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이력은 아주 범상치 않다. 민족사관고등학교, 다트머스대학교, 그리고 옥스퍼드에서 석사 그 후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다. 그 후에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록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동물에 대한 권리를 중시하고 그래서인지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만을 나열해도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좋은 학교를 가는 이유가 대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함이라는 상식이 있다. 그런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길을 걷을 때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가끔 멀쩡한 학교, 직장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나와서 종교인이 되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분명히 그렇지 않은 이유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전범선씨의 <해방촌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왜 그가 로스쿨을 가지 않고 역사학으로 석사까지 했는지 그리고 돈이 잘 되지 않는 서점을 운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약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온 대략 30여년의 세월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잘 서술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00쪽 정도의 짧은 책이지만 한번 즈음 생각해볼 이야기를 여러개 던져놓았다. 그 중 하나는 민족사관학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소수영재교육의 대표주자인 민족사관학교는 아주 똑똑한 학생들이 간다. 그런데 과학고나 외고와는 달리, 수업을 국어, 국사를 빼고는 영어를 쓴다. 나도 이점을 알고 있었는데 국제화에 발맞추었거니하고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약간만 더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학교 이름이 민족인데 영어로 수업을 하다니. 더 놀라운 것은 영어를 쓰지 않으면 벌점을 받는 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어이름을 권장한다고 한다. 100년전 우리 선현들이 우리 말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이름조차 강제로 바꾸어야 했는데 자발적으로 우리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이름도 바꾸는 것이었다. 이러한 학교가 무슨 민족사관학교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그의 해석 매우 흥미로웠다.

미합중국이 대영제국에서 나왔듯이, 대한민국도 미합중국에서 나왔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와넌 독립하는 데 150년 넘게 걸렸고 이제는 서로 든든한 우방으로 잘 지낸다. 한국은 건국 100주년이지만 아직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일부다. 그게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살고, 나아가 선진국 반열에 오른 기저에는 미국의 도움이 컸다. 미국 모델을 잘 따라왔기 때문에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로큰롤 역시 미국 문화다. 좋든 싫든 미합중국은 대한민국의 뿌리고 나의 정체성이다 (42).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하고 말았다. 물론 우리나라가 미국과는 다르다. 하지만 광복 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뿌리가 어쩌면 미국이라는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내가 사고하는 방식은 미국인과 더 비슷하지 북한사람하고 더 비슷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사관학교의 영어교육철학(민사고에서는 영어는 앞서간 선진문명 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의 목적이 아니라라고 본다)에 대한 의문은 물론이고,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이 책이 매력적인 점은 사고의 솔직함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더라도 미국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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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도올의 중국일기 4>

Book 2021. 6. 13. 19:03

내가 도올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 당시 내 기억으로는 방송국에서 노자강의를 하셨는데 매우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아쉽게도 강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은 망각해버렸지만). 그 후 도올선생님은 철학자로 대중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고전을 아주 쉽게 풀어서 전달해주셨다.

나는 이런 대중친화성을 다른 철학자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학식과 재미를 둘다 잡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연구를 많이 하다보면 진지해고 사변적이 되어 대중들과 거리가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이 한 연구가 (특히 인문학인 경우) 현실에서 별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인문학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그 학문의 지혜를 알고 현실에서 반영시켜야 하는데 학문의 외길을 걷다보면 일반사람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를 쓰고 있게 마련이다.

반대로 대중적이다보면 학문에 정진할 시간이 없어지고 결과적으로 깊이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중들과 자꾸 만나다보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주로하고 쓴소리는 점차 줄여서 인기에 영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학자라기보다는 그저 연예인에 불과한 위치가 된다. 그래서 학문정진과 대중소통을 둘다 잘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도올선생님이 가장 그 균형을 가장 잘 잡는 것 같다.

또한 도올선생님의 독특한 점은 통섭의 학자라는 것이다. 그의 학력을 보아도 그럴 만한 것이 우선 생물학과로 입학했다가 신학대학교를 다녔다가 철학과를 다녔다. 그래서인지 사고하는 방식이 아주 폭넓다. 기본적으로 철학에 근간을 두지만 한학에서 밝고 종교, 역사 등등 조예가 밝은 부분이 많다. 그래서 파편화된 지식을 한 곳에 꿰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한국에서 대만에서 일본에서 미국에서 다녔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이 그가 이 세계를 단일한 시각이 아니라 폭넓게 보는데 일조한 것 같다.

도올선생님의 여러 저작 모두 흥미롭지만 다섯권으로 된 <도올의 중국일기>는 대중들이 읽기 가장 쉽게 되어 있다. 일단 기행문이기 때문에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 주로 그가 중국 동북지방을 돌면서 느낀 소회를 적었다. 일반 기행문과는 달리 그의 깊고 넓은 식견이 두루두루 녹여져 있다. 그래서 인문학 교양서 느낌도 준다. 책을 보면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는 그저 지나갈 만한 낡은 성관도 그의 시선으로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독자에게 다가온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4권에 나와있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이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당태종 이세민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친 사실은 누구나 배운다. 그리고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공을 배운다. 그런데 단 한번도 당나라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도올선생은 이 점을 통해서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이야기한다.

도올선생님께서 명확히 지적하셨듯이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의 많은 부분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문제는 김부식이 너무 사대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당나라가 중심이고 고구려가 변방이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고구려가 중심이었고 당나라가 변방으로 볼 여지는 없었을까.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리해서 정벌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도올선생님은 흥미로운 의견을 개진한다.

인문학을 배운다고 돈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는 다는 점에서 돈보다 더 값진 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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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Book 2021. 5. 27. 02:51

 

전세계 베스트 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는 베스트 셀러가 될만한 책일 뿐만 아니라 고전의 대열로 갈만한 책이다. 출간된 지 지금 읽어도 전혀 시사점이 줄어들지 않았다. 굉장히 난해하게 느낄 만한 철학 내용을 흥미로운 사례를 들어서 풀어낸다. 그래서 철학의 중요성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어쩌면 더 커졌다는 생각을 하게된 책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에도 논쟁적인 여러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내 이목을 끌었던 문제는 소수집단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문제였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을 간단하게 말하면 소수집단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대학입학시 가산점을 주는 것이다. 이 소수집단우대정책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주로 흑인이나 라틴 아메리카 인종의 학생에게 가산점을 준다(입학서류를 넣을 때 인종을 물어본다). 이 문제는 아직도 치열하게 그 정책의 바람직함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정책이 지지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가 시험 격차를 보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점수에 학생의 노력과 지능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겠지만 사회경제적인 요소도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잘 사는 학생이 90점 받은 것과 빈곤층 학생이 90점 받은 것은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을 보정해 주고자 소수집단우대정책을 펼치는 데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농어촌전형선발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입학하는 학생은 다른 일반전형과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서 선발된다.

두 번째는 다양성 증진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비슷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로만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사회의 공공이익에 부합하는 가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논의되는 것이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인데 사회구성원과 비슷한 비율로 사람을 뽑자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논리가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함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꽤 오랫동안 노예제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흑인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박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전의 백인이 저지른 과오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흑인같은 소수인종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이다.

소수자우대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 자체도 논쟁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입학에 있어서 소수자우대정책 크게 논쟁적이지는 않다(물론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논쟁은 매우 치열하고 수능 중심의 정시모집 확대를 논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를 다르게 조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최근 뜨거운 젠더문제로 말이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가부장 중심의 사회로 여성이 차별당했다. 그래서 이를 개선하고자 세계에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여성부도 있고, 여러 여성정책이 실행되고 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1번은 무조건 여자에게 준다든지, 혹은 성인지반영 예산을 고려해야 한다든지 여러 가지 정책들이 입안되고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책은 많지 않다.

미국의 소수자우대정책이 비판받는 것처럼 젠더정책이 비판받고 있다. 특히 과거 남자들에게 차별받았다는 이유로 현재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젊은 세대의 남자의 경우에는 차별은 어머니 세대가 받았는데 특혜는 현재 여자들이 받냐고 반문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젠더정책을 시행할 때 왜 시행해야 하는 지를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단순히 양성평등이라는 거대한 이유로 거칠게 실행하면 반드시 반발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젠더정책이 의거해야 할 이유는 다양성 증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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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투명사회>

Book 2021. 5. 20. 03:52

 

색다르고 굵직한 의견으로 유명한 철학자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한번즈음 제대로 깊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 책이다. 투명성은 시대의 화두이다. 행정학이나 정치학에서는 투명성을 자우 중요한 모토로 삼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투명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은 투명성을 크게 늘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투명성의 장점이 이미 많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반론도 아주 크지 않지만 나타나고 있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도 투명성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투명성이 거버넌스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점에서는 한병철의 여러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투명성이 장점이 단점을 상회하기 때문에 더 증진시켜야 한다고 본다.

우선 한병철의 의견에 가장 동의하는 것은 투명성이 오히려 정책효과성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필연적으로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되며, 그러다가 결국 잡담과 같이 얄팍해질 것이다...일이 숙성하도록 놓아두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140)

어떠한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비공개는 필수적이다. 모든 정책이 대중에 노정되었을 때 정책의 호흡은 빨라 지고 근시안적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정책이 꼭 필요하지만 인기가 없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정책과정을 모두 보여준다면 정책이 논의되기도 전에 자초될 것이다. 게다가 저자가 말했듯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렵다(141).”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하다보면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때로는 엉뚱하기도한 이야기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두 공개된다면 참여한 사람들은 입조심은 물론이거니와 뻔하고 안전한 이야기만 하게 될 것이다. 혁신은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뼈아픈 손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한병철의 투명성에는 향기가 없다(69)”며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 동조하기 힘들다. 한병철의 가장 큰 문제는 투명성에 있어서 정보의 방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투명성을 그저 모든 사람이 서로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한 것 같다. 특히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25)”라는 말을 하거나 전면적 감시 속에서 투명한 사회는 비인간적인 통제사회로 전락한다(97)”는 말을 한 것 같다.

David Heald는 일전에 투명성에는 방향성이 있음을 밝혔다. 그래서 정부가 시민을 보는 것과 시민이 정부를 보는 것은 다르다고 보았다. 한병철은 이를 모두 섞어서 이야기하였다. 나는 시민이 정부의 정보를 보는 것을 부분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부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정보는 반드시 시민에게 공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책임감있게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부패라는 악취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는 것은 제한적으로 이루어 져야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정보공개법이 제정되어 시민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정부는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개해야한다. 하지만 몇몇 경우에는 정보공개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현재 수사중인 사건에 대한 정보나 외교에 관련된 정보는 정보공개 대상이 아니다. 정부투명성은 원숙한 민주주의 사회 조성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어떻게 얼만큼 정보가 수집되고 공개되어야 하는 지는 꾸준히 논의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효과적으로 정보가 시민들을 위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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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지층들>

Book 2021. 5. 18. 21:32

 

<모더니티의 지층들>은 사회에 관심있어 하는 여러 학자들이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주제에 대한 글을 모은 책이다. 자본주의부터 어린이에 대한 개념까지 다양한 이야기 수록되어 있고 모두 직간접적으로 우리 삶과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주제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조원광씨가 쓴 <자본주의와 계급이론>이었다. 이 챕터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이의 갈등을 그렸는데 꽤나 솔직한 분석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노사관계는 오랫동안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이슈였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경영진을 향해 투쟁을 벌이는 것을 익숙하게 봐왔다. 하지만 언제가 이러한 모습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비정규직과 정규적간의 갈등문제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탄력적인 고용제도라는 미명 아래 비정규직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20여년이 흐른 지금 비정규직은 우리 삶에서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둘 다 프롤레타리아트다. 어찌되었건 부르주아지에 종속되어 노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들은 단결하지 않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자나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용주와 다름없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박대한다...상당수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이라도 더 부르주아지와 가까운 위치에서 안정을 누리고 싶어한다. 정규직의 눈에 비정규직은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동지로 바라볼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선과 눈을 잃어버렸다. 대신 부르주아지의 시선과 눈을 마련했다. 그 시선과 눈은 부르주아적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155).”

노동자들은 숫자는 많지만 권력에 있어서 힘이 많지 않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목소리를 내야 겨우 경영진이 들을 까 말까한다. 그런데 노동자 사이의 반목이 생기면서 노동자들가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더욱 작아지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정규직 노동자라고 할 지라도 그들의 위치는 더 위협받게 되는 아이러니에 처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이유 중 하나가 자본주의적 욕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현실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은 그들의 심성이 고약하고 사악해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과연 자본주의적 욕망을 벗어날 수 있는가? (169)” 정말 정확한 분석이다. 나도 저자의 분석에 깊이 동의한다.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노동비용을 줄여야 하고, 비정규직을 통해서 같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면 내 월급도 오를 수 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규직이 되면 비정규직 사람들의 사정은 딱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강력한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벗어나느냐이다. 물론 경제가 팽창하는 시절에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수축사회에서는 이러한 상호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이타적으로 자신의 수입을 줄이면서 연대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인지 저자도 특별히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열망을 다른 열망으로 바꿀 수 있는 대책을 반드시 강국해보아야 한다.

이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이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노동의 종말이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하여 나날이 사람이 필요없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사이의 연대는커녕 정규직 노동자 자체가 사라지게 생겼다. 그동안의 노동문제를 풀던 방정식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새로운 방정식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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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slee

Felix <Condi: The Condoleezza Rice Story>

Book 2021. 3. 31. 19:41

사람은 매일 선택을 하며 산다. 작게는 오늘 먹을 점심메뉴를 선택하는 데 고민을 한다. 그리고 크게는 전공선택이나 진로선택을 할 수 있다. 그 크고 작은 선택들이 모여 어떠한 사람이 체화된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을 평가할 때 무슨 선택을 했는지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 선택을 보면 쉽게 수긍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떠한 경우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특히 납득이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시정부 시절 국무부 장관을 했던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의 경우, 그가 공화당 정부에서 일하게 된 이유가 나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미국 공화당의 경우에는 링컨대통령을 필두로 한때 노예해방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 형국이 바뀌어 공화당은 흑인 인권에 소홀히 한 당이 되었고 반대로 민주당은 흑인 인권에 적극적인 당이 되었다. 1964년 민주당 존슨대통령 정부시절 통과된 민권법은 흑인 인권 향상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흑인인 미국인들을 민주당을 지지해야만 할 것 같다. 실제로도 다수의 흑인이 민주당을 지지한다. 그런데 공화당을 지지하는 흑인이 있다.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처럼 적극적으로 공화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을 보면 마치 부산사람인데 기아타이거즈를 응원하고 거꾸로 광주사람인데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에 대한 전기를 읽으면서 흑인인 그가 공화당이 된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Condi takes a ribbing from their black friends for being a Republican, but she is firm and confident in her position. “I’m in the GOP for the right reasons,” she said. “I like our foreign policy stance better. I really am a smaller government person. I don’t think every solution is in Washington.” (p.122)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흑인이 그의 친구들이 무슨 공화당이냐고 놀린 모양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3가지 이유로 공화당원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첫째는 공화당의 외교정책이 마음이 들었다. 둘째, 공화당이 지향하는 작은 정부를 지지하였다. 셋째, 문제의 해결책이 워싱턴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어느 정당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정당의 경제정책에 중점을 둘 수 있고 어떠한 사람은 복지정책을 가중치를 두어서 선택할 수 있다.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그 기준을 다를 수 있다. 또한 정당이 모든 면에서 개인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다수의 정책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지만 몇 개 안되는 정책이 몹시 마음에 들 수 있다. 그래서 생각의 결을 같이 하는 정책의 수가 많더라도 그 정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딱 하나의 정책이 마음에 들어서 그 정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거만한 고정관념이 될 수 있다. 다른 이유로 흑인이더라도 공화당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선택을 궁금하면 뭍지도 않고 한심해 여기지 말고 왜 그랬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처럼 대답했다면 그의 선택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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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희 <현대중국정치 제도와 과정>

Book 2020. 10. 24. 11:30

이계희 교수가 집필한 <현대중국정치제도와 과정>은 중국 그리고 특히 중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저작이다. 그런데 정치학을 전공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행정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정치학 책이 행정을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중국정치와 행정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행정학 원론> 교과서 서두에서 나오는 정치행정일원론과 이원론 논의에 있어서 중국은 철저히 정치행정일원론을 따르는 국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행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치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중국 정치학에서의 중요한 주제인 정치제도의 역사적 연원, 중국선거제도, 공산당--행정부와의 관계, 대만과의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이 책의 장점은 중국정치를 전공을 하는 사람이 보기에도 도움이 되는 내용일 뿐 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읽더라도 이해가 될 수 있게 어렵게 쓰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공서로서도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교양서로서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

혹자는 중국의 정치나 행정에서 특별히 우리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견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14억 인구를 관리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로 그들의 정치적 작동 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에서 정부는 비즈니스부터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중국과 자주 교류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행정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이 책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제4장 주민자치와 기층거버넌스였다. 중국에서 정부와 시민(인민이라고 불러야 더 적합하겠다)의 관계는 우리와 그것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 중국의 경우, 정부에서 인민을 일방적으로 관리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인민들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중국의 밀레니엄 세대도 성인이 되었다. 이들은 예전 세대와는 다르게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세대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중국 정부가 다양해진 인민들의 요구를 어떻게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지도 하나의 과제이다. 이 책에서도 중국 정부의 변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주민자치와 더불어 눈여겨본 부분은 제6장 연방제 논의와 제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분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중국은 아무리 중앙집권제를 추구하지만 영토가 너무 넓어서(참고로 산동성 하나만해도 우리나라보다 넓다) 근본적으로 지방정부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맡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방정부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줄 것인가의 문제이다. 정부간 관계에 있어서 통제와 자율사이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 이 책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 정치와 행정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중국어 표기이다. 이 문제는 이 책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중국에 대한 도서를 보면 대체로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인이나 명칭은 우리나라식 발음으로 표기하고, 그 후는 현재 중국어 발음과 비슷하게 표기를 한다. 개인적으로는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명칭도 우리 식으로 부르는 것은 어떨 까 한다. 왜냐하면 한글로 한자를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성조 때문에 정확히 중국명칭을 발음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쪽에 웬스카이(袁世凱)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발음한다면 유우엔 쓰! 카아이로 읽을 것 같다. 차라리 중국어 특유의 성조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리나라 방식으로 원세개로 쓰고 읽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 개정된 이 책은 중국정치행정분야의 최신 문제는 물론이고 부록으로 2017년에 수정된 중국공산당 장정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저자는 중국인민공화국 헌법이 실었다. 중국공산당 장정과 중국인민공화국 헌법이 중국정부의 행동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중국정부이 작동하는 근본적 원리를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과는 어떻게 다른 지를 확인하면서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가깝게 위치하여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중국정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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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배따라기>

Book 2020. 7. 14. 12:19

소담출판사에서 발간된 <배따라기>는 김동인 작가의 단편소설 <배따라기>, <약한 자의 슬픔>, <태형>, <감자>, <광염소나타>, <광화사>,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김연실전>가 담겨 있다. 작가는 1900년에 태어나 1951년에 돌아가셨다. 그만큼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지루하거나 이해가 안되지 않고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100여년에 쓰인 만큼 그 당시의 사회상도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김연실전>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여성이 100여년 전에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명학교 설립되면서 어느덧 평양 시민에게 기생학교라고 부름을 들었다. 장래의 기생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현재 재학생 중에 기생이 많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직도 옛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양 시민들은, 자기네의 딸을 학교에 보내기를 꺼린 것이다. 더욱이 그 때의 학령이라는 것은 열 살 이상 열다섯 내지 열일열덟이었으매, 그런 과년한 딸을 백주에 길에 내놓으며, 더욱이 새파란 남자 선생한테 글을 배운다든가 하는 일은,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며, 잘못하다가는 딸에게 학문을 가르치려다가 다른 일을 될 것을 염려하여, 진명여학교의 설립을 무시하여 버렸다. 그 대시 내외를 그다지 엄히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 기생의 딸 혹은 소실의 딸들이 이 학교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더욱이 여염집의 딸들은 이 학교를 천시하고, 드디어 그 칭호까지도 진명학교라 부르지 않고 기생학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명학교는 지금 서울에 진명여고로 아직까지 있는 유서깊은 학교이다. 지금 여자가 학교를 다닌 것을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정신병자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학교를 기생학교라고 칭하는 일은 더욱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가 학교를 다니는 것을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자조차도 백안시여긴 것이다. 가끔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얼마나 일시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의 관념을 바꾸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에 너무 맹목적으로 믿음을 가지지 말고 다른 의견에도 귀기울이는 것에 대해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진명학교의 예는 극명하게 사회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점이 있는 구석도 있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묘사를 보면 다음과 되어 있다.

"노총각 M이 결혼했다. 32세였다고 한다. M은 가난하였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어떤 회사의 월급쟁이였습니다. 이 뿌리 약한 그의 경제 상태가 그로 하여금 늙도록 총각으로 지내게 한 듯도 합니다."

물론 지금 32세라고 해서 노총각이라고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변화는 나름 최근에 생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남자들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다음에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긴적이 있었다. 그래서 30대가 넘어가면 나이가 든 것이 아닌 가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30대는 아직도 청춘이고 40대정도 되어야하지 노총각이라는 말이 나올까말까한다. 그것도 노총각이라는 말이 결혼을 해야한 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근래는 점차 결혼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비혼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이서 노총각이라는 단어자체가 용도폐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결혼을 하고 싶은 데 결혼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청년세대에서 결혼을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경제문제일 것이다. 이 경제문제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을 소설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사회적인 배경을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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