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therington과 Rudolph <Why Washington Won’t Work >

Book 2021. 8. 27. 02:17

정치는 어렵다.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생각과 욕구를 결집시켜서 공동체를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시민들의 역할이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정치의 핵심에는 시민의 대리인인 정부가 있다. 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다면 국정운영이 원활히 운영되기 어렵다. 정부신뢰에 대한 근심은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미국에도 심각한 문제이다. HetheringtonRudolph의 저작 <Why Washington Won’t Work>은 미국이 당면한 저조한 정부신뢰 원인에 대한 진단이다.

미국의 유수의 기관에서 매년 정부신뢰를 조사한다. 대부분의 조사에서 나오는 결과는 조사가 시작된 1960년대보다 현재 (9.11 테러때 잠깐 오른 것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하락세라는 것이다. 이 이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설파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역시 정치형국의 대변화이다. 1960년만 하더라도 세계대전이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냉전시국이었다. 지금이야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여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1980년대까지 공산권 국가와의 대치는 미국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인들의 이목은 자잘한 국내정치보다는 외교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국민들은 대체적으로 왠만한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자국의 정부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뢰도 덩달아 높았는데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구심점이 사라졌고 미국인은 국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부에 불만을 토로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 모습이 낮설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부신뢰를 체계적으로 측정한 것이 21세기 이후여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시절 정부신뢰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추측건데 아무리 지금이 살기 좋더라도 그 때 정부신뢰가 더 높았을 것 같다. 아무래도 정부에 대한 기대도 지금보다 낮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정부에 불만이 있더라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지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정부신뢰형상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저자들이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이외에 정부신뢰하락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당파성이다. 간단히 말해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상대방을 더 싫어해서 상대방 정부가 집권했을 때 정책내용이 무엇이든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는 경우다. 이러한 당파성이 신뢰에 미치는 것을 아래와 같이 잘 설명했다.

“...when their party is in power, partisans employ criteria favorable to their side when asked to evaluate the government, causing them to express more trust. When their party is out of power, however, partisans employ criteria that are unfavorable to their opponents, causing them to express less trust. (p.73)”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정부성과나 정책 그 자체를 평가할 때 다른 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내로남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자신의 편이 하는 성과는 후하게 평가하고 상대방이 하는 성과는 깍아내리는 것이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팽배하여 국정운영에 차질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당파성을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만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초당파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다. 당파적으로 이해가 갈리는 정책말고 국가기간사업투자같은 정치색이 다른 정치인들도 호응할 만한 정책으로 우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선택지가 없다면 정치색으로 중립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평가들을 꾸려서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 있으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정치색이 없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공염불에 그칠 만한 제안이지만 그래도 노력을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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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편) <현대사회와 인권>

Book 2021. 8. 18. 21:27

인간의 권리라는 단어 인권. 인권이라는 단어는 쉽게 쓸 수 있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날뿐더러 논쟁도 많다. <현대사회와 인권>에서는 아동인권, 외국인노동자 인권, 청소년 인권, 여성인권, 장애인 인권, 수형자 인권부터 국가보안법, 보건의료제도, 환경적 약자에 있어서 인권까지 현대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인권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다. 책이 발간된지 20년이 지나서 어떤 문제는 철지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의 경우에는 지금도 충분히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떠한 문제는 20년전의 취지와는 달리 인권의 보장되었는데 반발이 거세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도 논의될 만하다.

최근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을 정령하면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여성의 인권이다. 우리나라 여성인권이 낮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서유럽에 비하면 맞는 말이겠지만 이슬람 국가와는 비교하면 훨씬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이슬람 중에서 탈레반은 여성의 인권을 극심히 탄압한다. 그래서 탈레반을 비판하면 문화상대주의를 든다. 인권이라는 것이 서구의 개념이고 서구권 기준으로 평가를 하니 이슬람의 여성 인권이 낮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개념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잘 정립해야 한다.

책에 있는 노라니 오트만이 쓴 <이슬람 문화와 여성의 시민권>에서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Sister in Islam의 창립멤버로 말레이시아 사람인 것 같다. 그의 글에 따르면 우선 서구권의 시각으로 보면 이슬람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서구권 개념을 비서구사회에 강요하는 것은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양성평등이 서구권의 개념만은 아니고 이슬람적인 개념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 따르면 성적 평등을 추구한다고 한다. 다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탈레반 같은 근본주의자들이 오히려 양성평등을 해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글을 보면 서구권의 시각을 가지고 보면 이슬람의 여성인권이 낙후되어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근본주의자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 나는 한국인이지만 미국식 교육을 은연중에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서구식 인권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여성이라고 하면 탄압받는 존재로만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성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것은 소수일까? 일부의 이슬람에서만 여성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을까? 너무 헐리우드 영화를 보아서 이슬람하면 무조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되는 것까하는 자문을 해본다.

내가 아무리 서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지역이 일부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을 한다. 이슬람 국가에 가보지도 않은(갈 생각이 별로 없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오만한 것일까? 이슬람 여성들은 행복하게 사는데 내가 서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필요없는 걱정을 한 것일까? 여성인권지수를 만드는 국가는 일단 서구국가여서 이 기관에 만든 지수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노라리 오트만의 말대로 코란이 양성평등적이라면 어느 국가가 이 코란의 말씀을 제대로 구현하였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여자가 아니지만 선택을 하라면 서구권 인식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무지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슬람권에서 여자가 사는 것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더 불편할 것 같다. 물론 미국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벌어진 뉴욕주지사 엔드류 쿠오모의 성추행 사건을 보면서 아무리 서구권이라지만 여성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었는지 의심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개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 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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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Hugo <Les Miserable>

Book 2021. 8. 15. 23:59

<레 미제라블>은 단연코 고전이다. 읽을 때마다 경탄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미 줄거리를 뻔히 아는데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이 번에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이 소설은 참 사회의 여러 군상을 잘 그렸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근래 아동을 학대하는 뉴스를 보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하는데 소설 속 테나르디에(Thenardier) 부부를 보면 그 때도 참 인간답지 않은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에 미리에(Myriel) 주교같은 인물을 보면서 이 사회가 돌아가는데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한다. 빅토르 위고는 소설 안에 이러한 다양한 인물을 잘 녹여냈다.

그런 면에서 자베르(Javert) 경감의 자살도 관심을 끌었다. 자베르는 지독하게도 장발장을 체포하려고 한다. 어떤 면에서 그의 직업 의식은 아주 투철하다고 볼 수 있다. 경찰로서 범인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자베르는 이를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다. 이러한 투철한 직업 의식 기저에는 아마도 범죄자는 곧 악인이라는 가정이 제대로 깔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열심히 일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장발장이 자베르를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준다. 이 시점에서 자베르는 크나 큰 가치관의 혼란이 오는 것 같다. 사악한 인간이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자베르에게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삶의 믿음이었던 가치가 무너져 내리자 자베르는 그동안 삶도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살한 것이다. 이런 점이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삶을 지탱하는 가치가 그 삶을 규정한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지만 실제 역사 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800년대 초중반이다. 특히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사랑을 하던 시기는 1832년 혁명시기를 다룬다. 이 때의 프랑스는 지금의 프랑스와는 달리 아주 혼란이었다. 오랜 절대왕정의 시기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일단 일단락지어진다. 그 후, 로베르피에르의 공포정치, 그리고 나폴레옹이 나타난다. 나폴레옹은 1815년에 실각하고 다시 왕정복고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미 한 번 자유를 맛본 시민들은 왕정치하에서 여러 번 혁명을 일으킨다. 아쉽게도 대부분 실패하는데 마리우스가 참여한 봉기도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격동기에서의 삶은 평온기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 산 속에 사는 자연인이 아닌 이상 그 당시 사회상황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레미제라블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다. 마치 지금 우리가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에 영향을 받듯 말이다. 이러한 사회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의 행동을 보는 것이 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애잔한 부분은 역시 장발장(Jean Valjean)이 죽을 때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온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왔는때 인간은 가장 솔직해지는 것 같다.(물론 사고로 죽는 경우는 제외한다. 그 경우에는 제대로 생각을 못해보고 죽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 살았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이 인생 정말 뿌듯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장발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장발장이 물론 영웅은 아니다. 그런데 대단히 스펙타클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다. 너무 가난하여 빵을 훔치다가 감옥에 가고 그곳에서 탈옥을 시도하다가 19년 동안 수옥생활을 했는데 출옥해서 마들렌(Madeleine)이라는 이름으로 시장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딸도 아닌 코제트(Cosette)를 키우고 마리우스(Marius)와 결혼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일련의 범상치 않은 삶을 산 그가 임종에 이르러서 한 생각은 무엇일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또한 한편으로는 어떤 인생을 살든 죽음앞에서 평등하니 좀 더 베불고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욕을 부려도 어차피 죽을 것인데 좀 더 의미있게 사는 건 어떨까.

 

posted by ys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