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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4 <도산기념관>
- 2019.08.11 <서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
- 2019.08.05 <성북선잠박물관>
- 2019.08.02 <내 이름은 빨강머리 앤>
- 2019.08.01 <백범김구기념관>
- 2019.07.26 <에릭 요한슨 사진전>
- 2019.07.21 <전태일기념관>
- 2019.04.09 <주한중국문화원>
- 2019.04.02 <국립민속박물관>
- 2019.03.25 <몽촌역사관>
글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도산기념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 중에 한 곳에 위치해있다. 명품샵들이 즐비하고 값비싼 레스토랑이 많은 이 동네에 <도산공원>이 있고 그 공원안에 <도산기념관>이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도산(島山)”은 안창호 선생님의 호이다. 놀랍게도 이 도산이라는 호가 그가 하와이에서 일한 배경을 통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도산이라는 뜻이 산처럼 우뚝선 섬이라는 것이다. 하와이가 당시에는 도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도산선생님은 1878년 안흥국의 3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인 안흥국은 그가 11살일 때 별세하였다고 한다. 100년 전에는 가부장적인 사회질서가 만연하였을 때인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상당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 때 도산선생님네 집은 어떻게 경제활동을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이야 아기나 적게 낳지만 그에게는 형제도 있었다. 사회전체적으로 농업기술이 발전되어있지 않아서 식량도 부족한데 그가 잘 성장한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10대 때 서당을 다니기도 한고, 김현진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그래서 그가 갓을 쓰고 있는 모습도 남아있다). 그리고 서울로 와서 밀러학당에 입학하고 기독교에 입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21세에 평안남도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확실히 그당시 20대와 지금의 20대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 것 같다. 지금 20대라고 해보았자,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아닌 이상이야, 해놓은 것 하나없는 미생에 불과하지만 100년 전의 20대는 어엿한 어른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1902년 대한제국시절 도산선생은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지금도 센프란시스코는 꽤 먼곳으로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가야한다. 그런데 100년 전에는 배를 타고 몇 개월 거쳐서 가야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지금에야 가기 전에 정보를 알아서 가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이라는 존재는 미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도산선생께서 영어를 가기 전부터 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파벳이나 알았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생활력이 있는 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가 한 여러 일이 있다. 그 중 하나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한 것이다. 나같이 인생을 30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흥사단은 예전 기차에서 먹을 것을 파는 단체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마저도 KTX에서는 먹을 것을 전혀 팔지 않으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흥사단이 무엇인지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흥사단은 도산이 설립한 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흥사단의 활동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 있다.
도산선생님은 일제에 의해서 투옥되었다가 1938년에 돌아가신다. 우리나라에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시지만 그 중 가장 원통한 것은 광복의 기쁨을 못보고 돌아가신 것이다. 물론 광복 후의 혼란과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을 독립을 위해서 살아오신 독립운동가분들에게 독립은 인생 그 자체였다. 그런데 도산선생님은 김구선생님과는 달리 이 독립을 보지 못하지고 돌아가시고 만다.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너무 화가 나서 죽고 싶지 않으셨을 것 같다. 충분히 편안한 삶을 사실 수도 있었는데 일본과 전혀 결탁하지 않고 독립의 뜻을 지키셨던 그 마음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모습이 피폐했지만 그 눈빛은 결기를 잊지 않았음을 본다.
도산 선생님은 미국,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썼다. <도산기념관>에는 그의 흔적이 잘 남아있다. 도산공원 쪽에 데이트를 하러간다면 조금 일찍 가서 <도산기념관>에 들려 그의 생각과 뜻을 한번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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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림동에 있는 <서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에 다녀왔다. 별기대하고 가지 않았다가 큰 감동을 받고 오게 되었다. 서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위에는 서소문 역사공원 그리고 아래에는 박물관으로 어울어진 아름다운 장소이다. 종교가 없는 나도 크나큰 감동을 받았는데, 다른 유락시설에서 받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단 당연한 소리이지만 건축물이 상당히 천주교 느낌이 물씬 풍긴다. 성당에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게 된다. 우리나라 성당은 외국의 성당, 특히 이탈리아 성당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적갈색 스타일의 성당인데 지하에 있어서 그런지 예전에 이곳에서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인들이 자신의 신념을 숨어서 지켰던 느낌도 준다. 그리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끔 하는 예술작품들이 많았다. 상당히 무게감있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 그리고 외로움들을 잘 표현한 것들이 잘 어울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즐겁고 신날 때는 종교를 잘 찾지 않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찾고는 하는데 천주교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따듯하게 포옹해 주기 위한 것을 생각하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지만 텅 비어있는 공간미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중간에 뻥뚫려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준 것 같다. 특별히 무언가를 빽빽이 채워넣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약간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중간에 천주교 음악이 나오는 묵상의 공간이 있는데, 들어가는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 였다. 엄청난 홀리함이 온몸을 휘감았는데 하마터면 종교를 가질 뻔 했다. 그 자리에서 멍한채로 몇 분간 아무 생각없이 있었는데, 무언 가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짜릿했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천주교 관련 서적을 중심으로 한 작은 도서관이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우리나라 천주교가 어떻게 들어왔고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곳 서소문 근처는 사형이 집행되고 잘린 머리가 효수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당시 이교로서 낙인찍힌 천주교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사형당했다고 한다.
가장 알려진 박해는 우선 신유박해이다. 1801년에 있었던 이 탄압은 천주교에 관대하였던 정조가 죽고난 후 일어난다. 지금이야 천주교를 당연히 종교로서 인정하고 있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성리학 교조주의의 사회에서는 유교적 질서와는 사뭇 다른 천주교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보는 것까지는 괜찮은 데 믿지 말라고 사형하고 유배를 보낸 것이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사상에 대해서 가차없이 철퇴를 내린 것인데 그런 것이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고 30여년 후인 1839년 기해년에 박해가 또 일어난다. 이때는 단순히 종교적인 박해를 넘어서 세도정치 하의 당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야 빠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10년이 다르게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아직도 30년정도의 시간은 사회의 변화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은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난다. 이 때 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대건 신부께서 순교하신다. 19세기 중반인데도 나라를 허약한데 종교에 대한 탄압이나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1864년 병인년에 다시 박해가 일어난다. 불과 150여년전 이야기이다. 물론 지나간 이야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는 쉽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타인의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관용적인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다르기 때문에 괄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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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성북동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전에 보지 못했던 박물관이 있어서 가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은 <성북선잠박물관>이었다. ‘선잠’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들어간 이유는 사실 바깥 날씨가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선잠’이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갔었지만 배운 것은 어느 박물관이상이었다.
선잠박물관은 조선시대 선잠단의 터가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선잠단이란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며 한 해의 풍요와 안정을 기원한 곳이라고 한다. 동대문구에 선농단이 있는데 그곳은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고 여기는 옷감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의식주이다. 이곳이 의(衣)를 관장하는 곳이다. 이름에 잠이 들어가는 것은 이것이 뽕입잠인데(예를 들어, 잠실이나 잠원은 뽕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이 뽕나무 누에에서 실을 뽑아 내서 옷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화학물질같은 것으로 인조옷감을 쉽게 만들어 내는 세상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인류는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실로 옷감을 만들고는 했다. 그리고 이 선잠단은 그 옷의 원료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선잠단에서 지내는 제사는 종묘와 사직에서 지내는 제사보다는 레벨이 낮지만 그 다음이 되는 나라의 제사로 꽤 큰 규모의 제사이다. 사실 예전에 사직단에 가서 아무 것도 없이 공간만 남아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 지 궁금했는데 여기 선잠단에서 설명이 대략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게하였다. 일단 단상같은 곳에 좋은 음식을 가져다두고 그곳에 절을 하는데 특이한 점은 옆에 음악밴드를 불러서 음악을 연주하고 심지어 그에 맞는 춤도 추었다고 한다. 음악이야 장중하게 연주한다고 치고 어떻게 춤을 추었을지 상상하니 조금은 웃기기는 했지만 제사에 맞는 신체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은 <친잠의궤>였다. <친잠의궤>란 친잠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친잠례란 왕비가 손수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한다. 이 친잠례를 어떻게 했는지 아주 소상히 기록을 해놓았다. 어떠한 도구를 사용했는지 색, 모양, 크기 등등부터 어떻게 의식이 진행되었는지까지 세세하게 써서, 이 매뉴얼만 있으면 지금도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조선왕조가 온갖 병폐에도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철저한 기록문화에 있다고 본다. 탄탄한 기록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비단 친잠례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도 기록이 잘 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 와서 둘러보면서 뜻하지않게 소소하게 여러 것을 알게되었는 우선 뽕나무가 영어로 Mulberry라고 부른 다는 것이다. 나는 멀베리라는 의류업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멀베리가 뽕나무인 것을 전혀 몰랐다. 가끔 영어단어를 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식물류의 단어는 역시 매우 부족한 것을 새삼 느꼈다. 더 놀라운 곳은 이 뽕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를 오디라고 부른 다는 것이다. 나는 뽕나무도 알고 오디도 알았는데 오디가 뽕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라는 것을 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시회에서는 옷감에 쪽빛을 물등린 이승철교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 ‘쪽’빛이라고 할 때 쪽이 남색을 표현하는 어떠한 형용사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쪽이라는 식물이 있었다. 이 쪽이라는 식물에서 나오는 것을 통해서 쪽빛의 염료를 얻는 것이었다. 이러한 처음듣는 사실에 역시 인생은 겸손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된다.
성북동에는 여러 볼 곳이 많지만 이 선잠박물관도 그곳 중 한 곳이 될 것이다. 이곳의 직원분들도 친절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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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빨강머리 앤>의 드높은 이름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나 사실 나는 이 책 혹은 만화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남자여서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도 성별에 따라서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내용이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에게는 로봇을 손에 쥐어 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손에 쥐어 준다든지 하는 식의 차이 말이다. 그래서 일까 <빨강머리 앤>은 늘 나의 관심 밖의 무엇인가였다. 그래도 늦었지만 빨강머리 앤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좋은 전시였다. 물론 아마도 어렸을 적 <빨강머리 앤>을 접했던 사람들은 향수에 젖어서 전시회를 보았겠지만 나는 오히려 빨강머리 앤의 쓰여진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다.
<빨간머리의 앤>의 원어 제목은 왠지 Red Hair Anne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Anne of Green Gables>이다. Green Gables는 친척의 농장이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캐나다 작가인 몽고메리가 1908년에 출간한 작품이라고 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읽혀지는 것을 보면 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가를 불현 듯 느끼게 된다. 주인공 앤에게 저자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투명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가상적인 인물이지만 영원을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고전인 <빨간머리의 앤>도 출판사에게 여러 번의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작가가 여러 번의 거절에 의기소침해서 출간을 포기했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 되어주고 가상의 친구가 되어준 앤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머리 앤> 전시회에서도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많은 작가들이 예술품을 출품하였는데 각기 다른 느낌에 보는 사람은 또 다른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각 장(chapter)로 구분하여 앤이 거쳐온 삶의 여정, 그리고 느꼈던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또한 촉각적으로 표현한 여러 작품을 보았는데 역시 예술의 끝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사람의 창의성은 얼마나 대단한 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마치 스타워즈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9편으로 되어 있지만 그 사이 사이마다 스핀오프를 제작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것처럼 <빨강머리 앤>이라는 단일 저작에서 수많은 또다른 작품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빨강머리 앤>이라는 작품을 두고 여러 해석도 가능하고 의미부여도 가능하다. 이것이 예술의 위대함이 아닐까한다. 아무리 작가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창작을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하면 그만이고 그것이 또 효용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오히려 장려될 수 있다. 만약에 단순히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타인에게 전하고 싶으면 명료한 몇 문장으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마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사실 결혼축하곡으로 쓰여졌지만 추후 민주화 운동가로 쓰였는데 그 가사가 어떻게 해석되느냐는 받아들이는 입장의 것이다. <빨강머리 앤>의 결말은 굉장히 똑똑했던 앤이 대학입학허가까지 받았지만 여차저차한 이유로 대학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열악했던 여성인권을 생각해볼 수도 있고, 고향에 남아서 사람들과 오순도순사는 삶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소설을 그걸로 끝나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학진학을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대학은 진학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고, 결말이후의 앤의 삶에 대해서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앤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상도 가능하고 그의 의도에 대해서도 나만의 추측도 가능하다. 만약에 앤이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다면 이런저런 추측과 상상은 조금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서울숲 겔러리아 포레에서 열리고 있다. 나는 겔러리아 포레에 전시장이 있는 것을 처음알게되었는데 나름 괜찮은 것 같다. 특히 서울숲에 들렀다가 전시회도 보면 일석이조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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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의 갈등은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일본의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만행을 잊은 듯한 후안무치한 언행과 행동은 현재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노키기고 있다. 또한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분단되기 전에 살아계셨던 분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가는 시절이다. 70년이라는 세월은 분단이라는 상태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만약에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기에 상상해보았자이지만 그래도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백범김구기념관>에 다녀왔다.
1876년 김구선생님 어머니는 백범선생님을 무려 1주일간의 진통을 거친 후에 출산하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진통이 오면 산부인과에 가고 만약에 진통이 너무 길어지면 무통주사를 맞거나 협의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러한 기술을 커녕 신생아가 죽지 않으면 다행일 시절이었다. 난산이었지만 그래도 김구선생님은 잘 성장하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국은 조선왕조 말기였다. 그가 청년 때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다방면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국운을 바꿀 수는 없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많은 청년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1997년 IMF 경제위기 때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충격을 나도 기억한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경험은 IMF 경제위기와는 비견할 바가 안되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린 분들이 이 세대가 많다 예를 들어, 이시영 선생님 1869년, 안창호 선생님 1878년, 안중근 의사님 1879년, 김창숙 선생님 1879년, 신채호 선생님 1880년 등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망국의 과정을 목도했다.
백범선생님의 여러 업적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조직을 만들어서 독립을 위한 끈질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91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원래 조선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사람인줄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범선생님 같은 분들 덕분에 191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도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장봉기도 매우 중요하지만 임시정부를 세우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음을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사실 국가라는 것이 그 영토에 살고 있는 국민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제사회의 인정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에 국제사회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우리는 일본에 복속되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견뎌왔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백범선생님을 비롯한 유수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한 이유는 너무 명백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분들이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끈기이다. 35년이 넘는 세월을 독립운동을 매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후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다. 30대 때 일제 치하에 들어가서 거의 70대가 되어서야 광복이 된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인생의 대부분을 독립을 그리며 살아간 것이다. 이광수 같은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변절하여 일제에 충성한 것을 보면 백범선생님의 그 녹녹치 않은 세월을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티신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도 경외감을 느낀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더 어려운 것들도 이겨냈던 독립운동가들의 경험 덕분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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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에 사진작가는 무슨 의미일까.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만국민 사진작가 시대에 사진작가로서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 범상치 않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지금은 동호회 수준에서도 예전 작가수준의 사진기술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는 단순히 기술로는 승부를 볼 수 없고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에릭 요한슨 사진전>은 21세기에 사진작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에릭 요한슨의 작품은 고전적 의미에서는 100% 사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진도 찍지만 후반작업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현실적인 결과물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사람이 큰 전구를 하늘에 달아서 달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 사진이라든지, 이불을 끌고가는 것처럼 도로를 만드는 사진 같은 것은 도저히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네셔날 지오그라피에서 보여주는 사진과는 다른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네셔날 지오그라피에서 보여주는 사진도 매우 중요하고 노력이 많이 드는 사진이지만 에릭 요한슨의 작품은 새로운 상상력과 노력이 든다고 볼 수 있다.
에릭 요한슨의 작품 그 자체도 멋지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의 과정을 기록해서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이해도도 높아진다. 또한 사진이라고 하면 별고생을 하지 않고 손가락만 까닥하면 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도 깨부수는데 일조를 한다. 전시회에도 있었지만 유튜브에 에릭 요한슨 채널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Behind the scene>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지 볼 수 있다.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을 모두 보고 나와서 느낀 것은 그의 용기이다. 지금이야 자리를 어느 정도 잡은 작가이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그가 처음 작품을 시작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불안감같은 것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탠데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견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인은 모름지기 과거의 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새로울 수는 있는데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지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피카소처럼 그 새로움이 작가가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고흐처럼 사후에서야 세상의 인정받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영원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예술에는 정답이란 없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쉽게 점치기 어렵다. 물론 에릭 요한슨의 경우에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인정을 받은 경우이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지속하기까지는 꽤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이 그의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그가 가질 지도 모르는 고민은 아마도 지금 스타일을 고수하느냐 마느냐이다. 그의 사진전을 보고 나니 그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로서 자신 만의 스타일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사진을 보다가 어떠한 류의 사진을 보면 에릭 요한슨이 떠오를 것 같다. 에릭 요한슨은 자신 만의 스타일 안에서 계속 소재를 바꾸어 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 스타일을 계속 고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물론 작가의 자유이고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의 장단점이 있다. 예전에 피카소가 피카소답지 않게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이다. 스타일의 외연을 넓히면 스타일의 선명성이 떨어진다. 반대로 하나의 지엽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다보면 에릭 요한슨이라는 작가가 가진 스펙트럼이 좁아진다. 이러한 트레이드 오프(Trade-off)를 에릭 요한슨은 어떻게 극복할 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왕성하게 작품을 내는 만큼 앞으로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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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전태일 열사께서 돌아가신지 40년이 다되어가는 이 시점에 <전태일기념관>이 청계천에 생겼다. 1948년에 태어나 1970년 22살에 나이에 스스로를 불태워 노동의 문제를 온몸으로 알린 그 분의 이름으로 기념관이 세워졌다. 우리나라가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고도성장을 할 시기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하루에 15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해가면 살았다. 물론 전태일열사와 동일한 모습은 아마도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많은 부분 넘어거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이 문제도 사실 관심을 가져야한다) 있지만 인간다운 노동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치열하게 해야한다.
1층과 3층에서는 고 노회찬 의원의 추모전시가 있었다. 노회찬 의원같은 분은 작은 양심의 가책에도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데 오히려 큰 과오가 있는 자들은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이 세상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노동현실의 개선을 위해 헌신한 노회찬 의원님같은 분을 기리고 그 분의 지향한 바를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노회찬 의원 추모전시는 <전태일 기념관>과 결을 같이한다.
그리고 3층과 4층에서는 전태일 열사 상설전시관이 있다. 그가 살아온 길과 그 분의 유품 그리고 그 분의 뜻을 기렸던 조영래 변호사님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다. 전태일이라는 사람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의 숭고한 뜻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무수한 노동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쓰여지고 버려지는 하나의 부속품같은 존재였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누구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다운 노동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근로여건은 개선되어 왔다. 이제는 국가권력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영향으로 인하여 동자들은 어려운 처지에 몰려있다.
<전태일 기념관> 앞에는 <미생>의 주인공의 장그래와 전태일열사가 같이 서있는 모습이 있다. 형태는 바뀌었을 지언정 하루하루를 불안으로 채우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구의역 역사 사고참사라든지 삼성백혈병 문제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태일 기념관>은 단순히 전시실로서만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노동문제를 풀기위하여 교육을 하고 연구를 한다.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도 잘 관리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 과거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아픈 과거라고 덮어두기만 하면 또다시 그러한 아픔이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잘 적시하고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적용해서 해석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전태일 전시관>에서는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의 부분을 모두 대체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노동문제는 계속 될 것이다. 가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의문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남아있는 인간의 노동이 될 수 있으면 개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쪽으로 발현되었으면 하다. 물론 이것이 매우 이상적이라 실현이 잘 안되겠지만 이러한 꿈을 꾸고 그 꿈에 비슷하게만 가더라도 꽤 성공적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아마도 전태일 열사께서 바라던 그러한 미래가 아닐까 싶다. 약간 오래된 방법같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방법으로 국민 모두에게 적어도 헌법과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조되어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만 잘 지키더라도 지금의 많은 노동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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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관계는 아주 오래되었다. 워낙 가까이 있다보니 중국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쓰는 사자성어의 많은 경우가 중국에서 유래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중국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오히려 근래 들어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영향을 미치는 비중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중국이 크고 사람도 많아서 중국에 대해서 알아갈 것들이 많다. 비단 요즈음 커진 중국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서 중국쪽에서는 알리고 우리 쪽에서는 알 수 있는 공간이 <중국문화원>이다.
<주한중국문화원>은 광화문역과 서대문역 사이에 위치한 중국문화를 종합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중국에 대한 강연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문화산업 시장의 동향분석이라든지, 중국고전문학 강연 시리즈로 홍루몽, 서유기 등등 작품에 대해서 중국전문가들이 이야기를 해준다.
이러한 일회성 강좌뿐만 아니라 꾸준히 배울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그 프로그램은 꽤 다양해서 태극권, 서예, 전통무용, 전통악기, 중국어, 중국요리까지 다양하다. <중국문화원>에서 공신있게 강사를 초빙하기 때문에 강사의 탁월함에 대한 걱정을 덜 하고 수강을 신청할 수 있다. 수업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국어 입문을 제외한 수업은 심지어 면접도 있다. 면접을 통과한 사람만이 수강료를 수업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전시회도 연다. 사진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전을 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무료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을 가지지 않고 볼 수 있다. 처음 들어가서 보기가 어렵지 한번 들어가서 보면 때때로 바뀌는 전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약간 아쉬운 것은 홍보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계속 오게되는 느낌이다. 물론 지금 아는 사람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시가 무료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와서 관람해도 이득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홍보를 잘 안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문화원의 본래 목적이 중국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이라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것이 어떨까한다. 애당초 노력해서 기획하고 준비한 좋은 전시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사회적으로 이득일 것이다.
그리고 4층에는 도서실이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도서실인데 중국에 관한 책, 잡지, 비디오 등등을 갖추고 있고 앉아서 공부할 자리도 몇 석 있다. 중국어로 된 책만 있는 것은 아니고 중국에 대해 알 수 있게 하는 한국어로 된 책도 여러 권 있다. 조용히 중국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와서 학습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문화원이다보니 중국휴일에도 쉰다. 물론 같은 동양권으로서 설날이나 추석으로 우리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기간도 조금 다르고 단오절도 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오가 있기는 하지만 정말 예전에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쥐불놀이를 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만 유래하지 특별히 기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단오절도 중요한 기념일로 쉰다. 그리고 노동절도 우리보다 더 크게 쉰다. 또한 국경절이라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날도 1주일로 크게 쉰다.
또한 중국문화원 건물에서는 하지 않더라도 중국문화원에서는 중국영화를 방영하고 중국과 관련된 공연을 주관하기도 한다. 예전에 홍콩영화를 제외하고는 지금 우리가 흔하게 보는 영화는 당연히 우리나라 영화와 그리고 미국영화이다.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시야를 넓히고 싶다면 이러한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중국문화원이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인 가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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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옆에 있는 박물관이다. 우리나라 궁궐의 간판인 경복궁만 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국립민속박물관>까지 하루에 소화하는 것은 어렵지만 시간이 있다면 반드시 가볼만한 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광복 후1945년에 만들어졌다.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75년이다. 지금 자리로 옮긴 것은 1993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한류 등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 까지 나가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경복궁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하지만 <국립민속박물관>은 입장료가 없다. 꽤 괜찮은 조화인 것 같다. 경복궁에 왔다가 <국립민속박물관>에 들르는 관광객이 많은데 경복궁에 돈내고 박물관에 또다시 돈을 내면 화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먼저 들르고 경복궁에 들어가려는데 돈을 내려면 혼란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경복궁을 보고 박물관을 가는 사람이 박물관을 보고 경복궁을 보러가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걱정거리는 아닐 것 같다.
시설은 크게 1, 2, 3 전시실로 되어 있는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이 있다. 제1 전시실은 한국인의 하루, 제2 전시실은 한국의 일상, 그리고 제3 전시실은 한국의 일생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특별하지는 않다. 한국인으로서는 평소에 알아왔던 상식이라든지 국사책에 나올 법한 내용이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이 외국인보면 신기하고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현재 전시해설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어로 진행하고 있다. 한국어를 약간 줄이고 외국어 부분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은 어떨 까하는 생각이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좀 더 활동적인 박물관이 되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이 박물관에는 국보급 유물은 없다. 그리고 모조품으로 만든 부분이 꽤 많았는데 이것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관람객들이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은 오히려 전시실이 아니라 위로 솟은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에 있다. 나는 <국립민속박물관>을 가기 전에는 멀리서보이는 높은 한옥이 경복궁의 일부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박물관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매우 궁금해 하며 들어갔는데 아예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그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만약에 그 부분이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면 전망대로 쓰여도 좋을 것 같다. 가끔 일본에 가면 성에 올라서 주위를 내려다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쓰여도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주위에 청와대 보안유지로 인하여 못올라가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특징 중 하나는 민속촌 같은 공간도 야외에 있다는 것이다. 야외에 예전 한옥, 근대화 이후의 우리의 여러 모습을 포착한 공간이 있었다. 한국인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공간이고 외국인에게는 신기하게 보일 부분이다. 잘 해놓았는데 내용이 약간 두서가 없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공간이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시대별로 가옥을 해놓는다는지 아니면 아예 테마를 정해서 공간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복궁에 붙어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비한다면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시설이 <국립중앙박물관>급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차라리 중앙박물관이 할 수 없는 부분으로 차별화를 시키는 것은 어떨까 싶다. 좀 더 상호작용이 가능한 박물관으로 거듭나면 진짜 우리나라 사람이 살아온 바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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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공원에는 몽촌토성이 있다. 그래서 8호선 몽촌토성역도 있다. 지금은 서울이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가 되기 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정학적으로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강하류의 비옥한 땅이었던 서울에 사람이 많이 살았던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을 만든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지금은 북한을 막기위해서 긴 철책이 한반도를 갈라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에 베를린은 냉전시대 때 장벽으로 둘러쌓여있었다. 근래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기원전에도 방어막 구실을 할 존재가 형태는 다르지만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토성이다.
지금 성을 지으라고 하면 시멘트와 철근으로 짓겠지만 기원전에 이러한 기술이 없었으므로 그 당시에 할 수 있었던 것은 흙을 잘 쌓아서 그 위에 목조방을 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물론 기술의 차이는 있었지만 방어를 한다는 기능이 필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방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공격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오랜 약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의 탐욕은 정말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예전사람들이 어떻게 진지하게 연구를 한 사람들이 고고학자들이다. 이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올림픽 공원에 있었던 흔적이 단순히 흔적이 아니라 기원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지었던 토성과 주거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몽촌역사관>은 어떻게 몽촌토성이 이루어졌는지 알리고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아냈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몽촌역사관>은 이러한 내용을 될 수 있으면 쉽게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이곳에서 발견된 도구들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직접 사용해서 알 수 있게 했다. 특히 주로 오는 관람객이 학생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아이들이 좋아하게끔 시설을 만들어서 좋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이 와도 좋은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1992년에 개관한 이 역사관은 리모델링과 업데이트를 꾸준해서 그런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몽촌역사관>은 몽촌토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몽촌토성 근처의 풍납토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서도 몽촌토성처럼 설명을 해놓았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 토성이 현재에도 남아야 하는지의 당위성에 대해서 강조를 해주었으면 좋을 뻔 했다. 몽촌토성은 올림픽 공원 안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경우에는 주택가에 둘러쌓여 있는데 물론 인근 주민이 이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지만 올림픽 공원에 비해서는 공원의 기능이 덜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개발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동산 관심에도 불구하고 지켜야할 이유를 잘 써놓았으면 좋을 것 같다.
또한 백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놓았다. 송파구에서는 백제를 하나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로 삼은 것 같다. 그래서 올림픽공원에는 2012년에 <한성백제박물관>도 생겼다. 이러한 면에서 <몽촌역사관>과 기능이 겹친다. 이 김에 아예 <한성백제박물관>은 성인용으로 가고 <몽촌역사관>은 아동 체험 박물관으로 기능을 나누는 것도 바람직 할 것 같다. 특히 이미 <몽촌역사관>에는 수많은 학교에서 견학을 간다. 그리고 같이 올림픽 공원에 있지만 <몽촌역사관>이 <한성백제박물관>보다 가는 것이 좀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한성백제박물관>에 더 집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실 <몽촌역사관>같은 입장료도 받지 않는 공공도서관의 중요성이 도외시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관을 통해서 학생들이 우리 선조가 어떻게 살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도 <몽촌역사관>이 더 사랑 받는 공공박물관으로 거듭나서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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