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역사박물관>

Exhibition 2019. 3. 16. 22:05


부평은 나에게 낮선 곳이다. 부천과 종종 혼동이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부평과 부천이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천은 경기도의 시고 부평은 인천에 있는 구를 말한다. 그런데 <부평역사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놀랐다. 인천역사박물관도 아니고 부천역사박물관도 아닌 구인 부평이 따로 부평역사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의외였다. 하지만 둘러보고 나서 충분히 있어도 될 만한 곳이라고 느꼈다.


가장 만족한 이유는 아마도 시설과 서비스가 모두 좋았기 때문이다. Parasuraman과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Servqual(Service Quality)이라는 평가척도가 있는데 이 <부평역사박물관>은 고득점을 할 것 같다. 우선 유형성(Tangible)에서 합격이다. 유형성은 서비스의 물리적인 외관이다. 아무리 컨텐츠가 좋더라도 건물과 내부가 좋지 않다면 가기 꺼려질 것이다. 그런데 일단 <부평역사박물관>2007년에 만들어져서 그런지 꽤 신식이고 쾌적하였다. 가장 좋았던 장소는 2층에 통유리로 된 테라스같은 곳이 있었는데 동네주민들이 와서 휴식을 취하기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은 친절성(Courtesy)였다. 지금까지 갔던 그 어떤 박물관보다 안내해주시는 분이 친절했다. 처음왔다고 하니까 매우 친절하게 보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들어가자 이런 응대를 받으니 박물관의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 심지어 입장료도 없다. 다른 유료 박물관도 이렇게 친절한 적이 없었다. 안내해주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니 내용을 더 잘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박물관이 잘 관리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내용도 좋았다. 2층에 농경문화실이 있었는데 이것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부평이라는 동네가 비교적 최근에 개발이 많이 된 동네이기 때문에 오래전으로 올라가도 크게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농경문화실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아마도 학생들이 자주와서 그런 것 같다. 학생들이 부평에 대해서도 알 필요도 있지만 그 전의 역사를 볼 때 굳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않더라도 오래 전의 삶과 생활을 알게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


농경문화실 맞은편에 부평역사실이 있는데 여기가 부평역사박물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평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잘 전시해 놓았다. 특히 눈이 갔던 부분이 미군부대였다. 나는 카투사로 복무해서 미군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하루는 인천에 살었던 카투사 동기와 만날 일이 있어서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지금은 미국부대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자료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부평의 자동차 공장 편이었다. 지금도 GM공장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부평에서 자동차 공장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인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짧게 나온 것 같아 아쉬웠다. 혹시 상설전시관을 리모델링한다면 내용을 보강했으면 하는 부분이다.


1층에는 기증전시관과 기획전시실이 있었다. 아쉽게도 기획전시가 끝난 시점에 와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증전시관은 부평에 살았던 분들이 많이 기증을 해서 부평이 걸어온 모습을 잘 알 수 있게 해놓았다. 기증자들에게서 부평에 대한 애향심이 느껴졌다.


이 외에도 박물관에서는 미쓰비시 사택활용에 대한 학술회도 열고, 박물관 건물 밖에 야외전시체험장도 운영하는 등 상당히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박물관 홈페이지도 아주 전문적으로 잘 되어 있어서 신뢰감이 갔다. 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서 올라와 있다. 때로는 박물관이 자료는 많은데 시민들에게 개방을 안해서 도무지 박물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를 때가 종종 있는데 <부평역사박물관>은 그런 면에서도 투명성있게 자료를 잘 정리하고 발표하였다. 들어갈 때에는 무슨 부평역사박물관이라고 했다고 나오면서는 있어도 도리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곳을 많이 벤치마킹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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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에바 알머슨>

Exhibition 2019. 3. 10. 02:37


에바 알머슨(Eva Armisén)은 스페인 작가로서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팬을 보유한 작가이다. 그의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밝고, 귀엽고 가족적인 에너지를 가진 작품을 많이 발표하여 아이와 같이 가도 따스한 전시회였다.


전시회를 다 보고 느낀 점은 확실히 예술인에게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 그리고 못그리고를 떠난 문제이다. 남들과 다른 고유한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전시회 내내 보면서 그림이 에바 알머슨스타일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우리가 피카소를 높게 치는 것이 그만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다보면 피카소 스타일의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린이를 보고 피카소를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에 피카소 그림인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그린 경우가 있다. 그 경우에는 그 작가가 그만큼 독창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작가의 덕목이자 생명이다. 사진기술이 발달하기 전에야 될수록 사실과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사진발명된 후에는 더 이상 화가가 현실과 똑같이 그리는 것이 무의미해진 시대가 왔다. 이런 면에서 에바 알머슨은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한데 성공한 작가이다. 에바 알머슨이 그림을 잘 그린다 못 그린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림을 보면 딱 에바 알머슨이 생각나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놀란 점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았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에바 알머슨은 우리나라에 꽤 오랫동안 살면서 작업을 했다. 그래서 서울타워를 배경으로 한 그림부터 제주도 북촌한옥마을까지 다양하게 작업을 했다. 에바 알머슨의 시각으로 본 우리나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그림 뿐만 아니라 그 옆에 그림에 대한 설명도 조곤조곤 써놓았다. 그 설명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느낀 점을 읽을 수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작품은 해녀였다. 그는 해녀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해녀분들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서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출간하였다. 에바 알머슨가 느낀 해녀의 모습이 강렬하면서도 따듯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단순한 그림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각종 정부단체와 기업체와 협력을 하여 작업을 했다. 예를 들어, 두산타워, 엔젤리너스, 장흥예술공원, 스킨푸드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였다. 아마도 에바 알머슨의 작품이 눈에 익숙했던 이유가 아마도 이렇게 생활 속에 녹아든 작업을 우리나라에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전시회에 몰입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상화된 후,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촬영을 한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사진을 찍는 행위로 인해서 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전시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그림을 제대로 보지는 않고 사진을 찍는데에만 집중을 한다. 도무지 사진을 찍으러 왔는지 그림을 감상하러 왔는지 모를 판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다음에 집에가서 보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찍어놓고 보지도 않는다. 아마도 찍는 순간 그 그림을 소장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이는 매우 허위감정이다. 사진찍을 시간에 그림을 더 감상하는 것이 전시회를 보러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만약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사진만 찍을 것이라면 차라리 도록을 사는 것이 낫다. 도록을 구매해서 보고 또 보는 것이 낫다. 심지어 도록에 찍은 그림은 퀄리티도 좋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에게 하는 말이다.


혹은 사진을 찍어서 쇼셜미디어에 올릴 수도 있다.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기록하고 자랑할 수도 있다. 이것도 전시회장 앞에서 찍고 올리고 전시회장에 들어가서는 전시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이런 면에서 에바 알머슨전에서는 사진이 금지되어서 뜻하지 않게 그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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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나루에서 다리로>

Exhibition 2019. 3. 3. 22:17

대한민국의 자랑, 한강은 우리 인류가 살기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다. 이 한강을 아주 오랫동안 배를 타고 건너다가(물론 수영해서 건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본격적으로 정식적으로 다리를 놓고 건넌 것은 긴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최근의 일이다. 괜히 서울에 마포, 반포라는 가 들어간 지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 1900년에 지어진 후에 지금까지 31개의 한강다리가 지어졌다. 이에 대한 잔잔한 전시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나루에서 다리로>라는 이름으로 개최하였다.


사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지어졌지만 그 다음 한강대교가 1917년에 지어진 것 이외에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우후죽순 세워졌다. 이 다리 하나하나에는 건설 당시의 배경과 사연들이 남아 있다. 가장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다리는 우선 한강철교일 것이다. 한강철교는 현재는 A, B, C, D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A선은 1900, B선은 1912, C선은 1944년에 지어졌다. 일단 한강철교는 일본 강점기시대를 오롯이 보냈다.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당한 처지에서 이 다리를 지었을 지는 상상하기 싫을 정도이다. 이런 한강철교가 한국전쟁이 터진 후 얼마지나지 않아 폭파된다. 한강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행렬이 있었는데 그대로 폭파를 해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장면이다. 광복한지 불과 5년밖에 안되었는데 전쟁이 나서 다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대도 폭발해야했다니 말이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너무 분하고 슬프고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 땐 그랬다. 전쟁이 끝나고 C선이 1957년에 복구되고 1969년이 되어서야 A, B, C 선 모두 복구된다. 그리고 1995년에 D선이 만들어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는 한강철교가 다시는 슬픔에 잠기지 않았으면 하다.


한강철교이외에도 슬픔을 가지고 있는 다리가 성수대교이다. 성수대교는 197910월에 지어진 다리이다. 그런데 불과 15년만인 199410월 다리의 일부가 붕괴해서 49명이 떨어져서 32명이 죽은 사건이 발생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그 다음해 벌어진 삼풍백화점 사건 때문에 그 심각성이 적어보일지 모르지만 있어서도 안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후 기존의 다리를 부수고 새로 1997년에 만들어서 지금은 차들이 잘 다니고 있다. 1979년에 지었던 다리이다. 다른 다리도 이 때 지었던 다리는 위험할 수도 있다. 면밀한 점검을 통하여 시민의 안전에 만반의 대비를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슬픔만을 한강다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88올림픽을 기념한 올림픽 대교도 있다. 한강다리들이 대게 실용성에 치중해서 인지 대부분 각인이 되지 않는데 반하여 올림픽 대교는 중간 위에 성화봉송처럼 되어 있어서 볼 만하다. 앞으로 짓는 다리는 이렇게 조금 디자인적으로 특색있게 지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런던에는 런던브릿지가 세계적인 관광명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템즈강에 오면 런던브릿지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한강다리도 특색있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리는 반포대교이다. 초중고등학교를 반포에서 보냈기 때문에 종종 반포 고수부지를 찾고는 했었다. 잠수교에 특이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고나니 플로팅 아일랜드(지금의 새빛둥둥섬)가 생겨서 볼거리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여름밤이면 다리에서 멋진 분수쇼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선진국 분위기가 난다. 물론 아직도 여름에 장마가 와서 홍수가 지면 잠지고는 하는 지역이지만 그래도 정비도 잘 되어 있어서 한강시민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나 가족들의 산책장소로도 딱이다. 근래는 텐트족들도 많이 등장한 것 보면 트렌드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다리가 한강에 생길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강다리가 자살을 하러가는 곳이 아니라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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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Exhibition 2019. 2. 25. 01:30


서울 행촌동에는 딜쿠샤(Dilkusha)라는 독특한 이름의 건물이 있다. 나는 이곳을 <동네한바퀴>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고 갔었는데 도심에 이러한 오래된 건물이 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 적이 있다. 서울이 지난 50년 동안 급격히 도시화되면서 이전에 있었던 건물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 딜쿠샤라는 건물은 100년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이 딜쿠샤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딜쿠샤는 샨스크리트어로 기쁜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샨스크리트어로 지은 이유는 이 집의 주인이 인도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 집 주인은 알버트 테일러라는 미국인이었다. 이 사람은 조선에서 광산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1897년에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 출장갔다가 만난 메리와 1917년에 인도에서 결혼을 했다. 그의 부인이 인도여행을 눈여겨본 궁전이름이 딜쿠샤라고 한다. 그들은 이 이름을 따서 자신의 집의 이름으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이 비교적 쉬운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20세기 초만해도 세계여행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 라이트형제가 처음 비행기를 만든 것이 1903년의 일이다. 이 비행기가 상용화되어 일반사람들이 이용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 시대때 딜쿠샤 주인이 일본에 출장가고 인도가 가서 결혼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것도 모두 배와 기차에 의존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러면에 알버트 테일러나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국제화의 앞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알버트 테일러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AP통신원으로 우리나라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 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하여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교적 용이하게 전세계로 송고할 수 있다. 기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카메라로 찍어서 있었던 일들을 인터넷에 올려서 전세계적인 반응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는 정보통신 시설이 아주 빈약했던 시절이었다. 전화기가 1876년에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세계 각지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는 일은 매우 지난했던 일이었다. 1919년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알기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때 알버트 테일러가 이 사실을 통신원으로서 알려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고통을 알렸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소식을 알릴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도 중요한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사람이 아닌 제3국인의 입장으로서 객관적으로 있었던 사실을 알리는 것은 역사적 사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알버트 테일러는 3.1 운동뿐만 아니라 제암리 학살사건 등과 같은 일들 보도하였는데 일본은 그를 1942년에 미국으로 추방해버린다. 그는 이미 30년 넘게 우리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나 한국에 대해서 꽤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능력이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로서 설 수 있는데 일조한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1948년에 죽었는데 유해가 우리나라로 돌어와 서울에 뭍혔다. 이런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생각하는 지 가늠할 수 있다.


지금 딜쿠샤는 재난위험시설(D등급)지정되어 있다. 즉 붕괴의 위험에 처해있다. 문화재청같은 곳에서 보수 공사를 하겠지만 사람이 살기보다는 전시회장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알버트 테일러는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가 한 행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너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알버트 테일러라는 이름은 그리고 딜쿠샤라는 건물에서 다시 회자되고 100년전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posted by yslee

문화역서울 284 <커피사회>

Exhibition 2019. 2. 17. 19:56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커피는 기호품 수준을 넘어서 필수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커피전문점은 급속도로 늘어나서 서울의 경우에는 아주 쉽게 커피를 파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커피가 우리의 고유의 작물은 아니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이 불과 100여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게 한다. 커피가 우리나라 사회에 어떻게 정착했는지 보여주는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커피사회>는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커피사회>는 무료로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다. 들어갈 때, 입장권같이 커피컵을 준다. 이 컵을 들고 전시를 보면서 전시회장 곳곳에 마련된 무료 시음회에서 컵에다가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이 커피를 주는 업체도 헬까페, 프릳츠커피, 매뉴팩트 등 시중에서 잘 나가는 커피전문점에서 나와서 하기 때문에 먹어봄직하다. 그리고 금색으로 된 팜플렛을 주는데 아주 모양도 센스있고 내용도 튼실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를 읽으면 여러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주최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문화역서울284이다. 주최와 주관이 상당한 혼동되는데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주최''어떤 일 또는 행사에 대하여 계획하거나 최종 결정을 하며 이에 따르는 책임을 질 때' 쓰이는 데 반하여 '주관''어떤 일 또는 행사에 대하여 집행(실무 처리)할 때' 쓰인다고 한다. 즉 기본적인 계획과 궁극적인 책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직접 전시를 구성하지는 않고 <커피사회>의 경우에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문화역서울284가 하는 것이다. 커피인구가 우리나라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최는 시의적절했다.


그리고 후원은 La Marzocco이다. 이탈리아 커피기계의 명가인 La Marzocco는 이 전시회를 후원했는데 이 후원이라는 것이 협찬과 혼동된다. 또다시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후원은 상업적인 목적이나 금전을 매개로 하지 않는 도움을 줄 때 쓰이는 데 대하여 협찬은 금전적인 면에서 도움을 줄 때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La Marzocco는 전시회에 돈을 보탠 것이 아니라 돈을 제외한 면에서 전시회에 도움을 준 것이다.


많은 작가들과 커피전문점이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여 내용을 풍성하게 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박길종 작가의 <커피, 케이크, 트리>가 있다. 3단 케이크 단에 커피잔을 두었고 센스있게 소형기차모형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이 전시회의 환영하는 조형물로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복도쪽에 양민영 작가의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오아시스란 커피자판기이다. 근래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인스턴트 커피자판기는 커피소비의 주근원지였다(우리나라에 인스턴트 자판기는 1977년에 등장했다고한다). 지금이야 커피전문점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커피전문점에서 Takeout해서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커피전문점은 없고 건물마다 자판기가 있어서 동전 하나 두 개 넣고 커피를 뽑아마셨다. 그 때 커피를 뽑아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무실로 들어가고는 했다. 열심히 일하다가 잠깐 쉰다는 의미에서 작가는 오아시스라는 딱맞는 이름을 지은 것 같다. 이제 그 오아시스의 형태가 바뀌었지만 아마도 인간이 일을 하는 한 어떠한 형태로든 오아시스는 존재할 것 같다.


이 외에도 커피가 양탕국으로 불릴 시절부터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어떻게 커피를 생각했는지 여러 자료를 모았다. 보면서 느낀 것은 커피는 도시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농어촌에서도 커피를 마시지만 커피를 아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도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커피는 잠깐의 여유를 주고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생활의 연속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아니고 잠깐의 쉼표를 찍는 다는 느낌이다. 도시화가 점점 진행되는 이 추세에는 아마도 더 많은 커피를 소비하게 되지않을 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그리고 마치 지금 인스턴트 자판기 커피를 그리워하듯이, 지금의 커피문화를 반추할 수 있을 만큼 색다른 커피문화가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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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집>

Exhibition 2019. 2. 11. 01:01

2012년에 개관된 <한성백제박물관>은 기본적인 상설전시관 이외에도 시즌별로 특별 전시회를 하여 한번 갔던 사람들도 또 가게 하는 유인을 만들고 있다. 2019년을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쁘기 때문에 하루하루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유를 조금 가지고 한발짝 떨어져 생각해보면 서울땅에는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은 당연한 소리이지만 이제 이 땅에 없고 땅에 뭍여서 아마도 이제 그 뼈 산화되어서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아직도 유물로 남아 현대의 우리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201812월부터 224일까지 백제 생활문화 특별전시회의 일환으로 <백제의 집> 전시회를 열고 있다. 백제인들이 살았던 모습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유물하나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반인으로서 보기에 아마도 지금 사는 아파트라는 주거공간도 언젠가는 박물관에서나 소개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700년 전 지금 서울이 백제였던 시절에는 이 땅이 아파트 숲이 될지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통시적으로 길게 보았을 때 1700년 후인 3719년에 이 서울이라는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처럼 319년의 백제인이 지금 서울의 아파트를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에게 잊혀지고, 화장을 하지 않더라도 가루조차 남아있지 않는다면 좀 더 삶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자성의 순간이 온다. 어차피 미물에 불과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라면 지금 현순간을 더 즐겁고 의미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된 유물을 보면서 지금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자각을 하게되는 것이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박물관의 심리적인 치유기능이 아닐까한다.


<백제의 집>에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유물은 화장실이었다. 백제인과 지금의 대한민국사람은 아주 많은 측면에서 행동거지를 달리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배설활동이다. 백제시대나 지금이나 먹으면 내보내야한다. 전시회에서는 왕궁에 대형화장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똥을 누고 물을 내리면 그만이지만 이러한 수세식 화장실이 정착된 것은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일단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된 것은 광복한 후에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떻게 똥오줌을 처리했는지 궁금하다. 대부분 땅을 깊게 파서 똥오줌을 가두지 않았나 싶다.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마치 우산같은 경우처럼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형태만 조금 바뀌었지 비를 피하기 위해서 어떠한 물체를 머리 위쪽으로 가리는 것이 비슷한 것처럼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오기 전에는 어쩌면 백제시대나 1960년의 한국이나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자(虎子)”라고 불리는 이동식 요강을 귀족층은 들고 다닌 모양이다. 지금에야 공중화장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지만 백제시대 때 공중화장실이 있을리 만무하다. 귀족층이야 조신하게 호자에 용변을 본다고 하고 나머지 분들은 급하면 아마도 아무 곳이나 배출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렇게 되면 엄청 위생상 불결했을 탠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당시 인구가 많지 않아서 괜찮지 않았을까한다. 뜻하지 않게 유물하나를 보고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전시회의 마지막 부분에는 국사책에서 구구절절 배웠듯이 백제가 일본에 준 영향에 대해서 나와있다.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에 가서 살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 특히 일본이 임진왜란과 그리고 20세기 강제로 침략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준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 짝이없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유한 사이인데 이렇게 갈등할 수 밖에 없는 가하는 탄식이 나온다. 물론 생각해보면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싸우는 것을 보면 이해도 된다. 박물관에 오면 이렇게 꼭 본 것에 구속되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토대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영감받아 발전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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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박물관>

Exhibition 2019. 2. 4. 23:57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안양박물관>은 안양예술공원 근처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김중업 건축박물관>이 있어 안양에 사는 휴식삼아 오기 좋은 곳이다. <안양박물관>은 그동안 안양시가 걸어온 길을 보존한 공간으로서 크기는 크지 않다. 원래는 평촌아트홀에 2004년에 <안양역사관>으로 탄생한 이 박물관은 20179월에 지금 안양예술공원이 있는 자리에 개관하였다.


<안양박물관>은 무료로 누구에게나 관람이 개방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수익이 나는 구석이 없고 운영비용만 든다. <안양박물관>은 안양문화예술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안양문화예술재단에서 공개한 예산내역서를 보면 박물관에 관련해서는 수입이 없고 지출만 187천만원이 나갔다. 이 지출은 크게 문화사업비(51), 일반관리비(12-인건비(52)와 경비(68)), 자본적 지출(11-시설비 및 자산취득비), 그리고 성과급(3)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 예산은 모두 안양문화예술재단의 예산으로 집행된다.


<안양박물관>을 맡고 있는 안양문화예술재단은 한해 총예산은 182억정도된다. 182억을 이루는 수입은 크게 영업이익과 영업외 이익 그리고 자본잉여금수입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시 영업수익은 자체사업 수익과 기타사업수익(시설사용료, 부대시설임대수익 등) 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영업외 수익은 이자수입, 기부금 수입, 시출연금수익, 보조금 수익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 시출연금수익이 가장 중요하다. 안양시에서 낸 돈이 132억으로 수익금중 가장 크다. 그리고 이 안양시의 돈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시민들이 더 당당하게 안양문화예술재단이 하는 일을 향유하고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때로는 감시도 해야할 것이다. 안양문화예술재단에서는 <안양박물관>이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양아트센터>, <평촌아트홀>, <안양파빌리온>, <김중업건축박물관>를 운영중이다. 시민으로서 남의 시설이라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기가 낸 세금을 잘 사용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안양문화예술재단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돈을 사용처를 잘 공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상품권을 사서 친절직원에게 준 바가 있다는 정보도 잘 공개되어 있다. 그리고 부정청탁을 근절하기 위해서 클린신고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공금을 운영하는 데에 부정부패가 일어나면 그 기관에 대한 신뢰는 물론이거니와 정부 전체에 대한 신뢰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정보는 대중 그리고 언론매체게 낱낱이 공개할 필요가 있다.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재단이 2009년에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야 10여년의 역사를 가진 재단인데 정부가 운영하는 것보다 더 탄력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운영되기를 의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정부패만 없이 공정하게 운영 만되도 안양시에서 운영하는 것보다는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안양문화예술재단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안양박물관>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선사시대 때부터 지금의 안양지역에 어떠한 사람들이 살았는지 연구하는 것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때 안양의 위치를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광복 후의 안양의 모습을 잘 그려놓았다. 기본적인 시설에 대해서는 만족했으나 시대별 분량 면에서는 조금 불만족스러웠다. 물론 안양(安養)이라는 명칭이 고려시대 태조가 지은 안양사에서 왔다지만 행정구역으로서 안양은 1941년에서야 안양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73년에 안양시로 거듭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일제 강점기 이전의 안양은 아주 짧게 소개하고 광복 후 어떻게 안양이 성장했는지 집중해서 보여주었으면 하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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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 박물관>

Exhibition 2019. 1. 27. 23:45

김중업 선생님은 우리나라 현대 건축계의 한 획을 그린 분이다.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로서 주로 김수근 건축가와 많이 비교되고는 한다. 나는 건축가야 말로 현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예술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난해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이해를 구하는 현대미술가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는 건축가야 말로 예술사적인 위치를 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건축가 중에는 김중업 선생이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안양시에 그가 지었던 주식회사 우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김중업박물관>이 있다.


1922년에 태어나 1988년에 돌아가신 김중업 건축가는 그 당시로서는 쉽지 않게 국제적인 삶을 살았다. 프랑스에 가서 건축거장 르 크르뷔지에(Le Corbusier)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금도 디자인 스쿨 중에 탑인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ng)에서 교수직을 역임한다. 지금도 되기 어려운 RISD 교수를 70년대에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대단하다. 1970년대는 미국에는 인종적인 차별이 크게 남아 있었던 시절이고 아무리 뉴잉글랜드 지역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디자인 스쿨이라지만 동양인을 강단에 세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렇다고 그가 그 당시 시절의 교육 상황(그의 유년과 청소년기 때는 우리나라는 일본치하에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그가 엄청나게 영어를 잘 했을 것 같지 않다. 이 모든 악조건을 제쳐두고 그 정도 위치에 섰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인정을 받았던 것이 아닌 가 싶다. 이런 것을 보면 참으로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경력 중에 특이한 점은 그가 고국에 강제로 들어오지 못하고 프랑스에 있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970년 준공한지 3개월 만에 부서진 와우아파트에 관련하여 정부를 비판을 했다. 이에 정권의 눈총을 받고 프랑스에 망명하게 된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들어오지 못하다가 박대통령이 죽은 후에야 모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에는 그런 시절이었다. 정권을 비판한 대가는 혹독했다. 모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내에 있는 재산도 크게 악영향을 받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가 이러한 아픔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의 입지를 구축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올림픽 공원의 평화의 문이라든지 프랑스 대사관 관저, 서강대학교 본관 등등 여러 건물들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김중업박물관>은 위의 2가지 이야기 외에도 다양한 그의 이야기를 전시해두었다. 주제가 전시인만큼 말보다는 직접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이 많은 데 그가 만든 많은 건축물들도 잘 전시가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느낀 박물관에 대한 느낌은 잘 관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층마다 관리해주는 분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좋은 전시물이 있는 박물관이지만 여러 이유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김중업 박물관>은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이 현재 진행형으로 잘 관리되어 있어서 보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았다.


건축가는 건축으로서 이름을 남긴다. 이제 김중업 선생께서 돌어가신지 이제 30년이 넘었는데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나같이 건축에는 문외한인 사람도 알게되는 까닭은 그가 남긴 많은 건축물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흘러 수천년이 지난 후에는 어쩌면 건축물들이 없어짐에따라 그의 이름은 점점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남긴 건축물은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물리적으로는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교과서나 역사책에 남아서 누군가에 의해서 기억되지 않을 까한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참으로 잘 살았다고 평가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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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기념관>

Exhibition 2019. 1. 21. 00:15

지하철 4호선에 <상록수>역이 있다. 이 상록수역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안산에 상록수역이 생겼을까. 그 이유는 소설 <상록수>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고 그 배경이 지금은 안산시 본오동이고 예전에는 수원군 반월면 천곡동 샘골마을이였기 때문이다. <상록수>의 주인공은 채영신인데 심훈작가가 모티브를 실제 인물은 최용신이다. 그 최용신님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안산에 있다.


최용신선생님은 1909년에 태어나 1935년에 돌아가셨다. 26세의 그 당시로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가 샘터마을에 들어가서 교육을 한 것은 1931년으로 3년 남짓 이곳에서 보내시면서 문맹퇴치, 농촌계몽운동에 힘을 썼다. 3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불꽃처럼 보내시다가 안타깝게 과로로 돌아가신다. 혹자는 3년이라면 성과가 많지 않다고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3년이라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그의 뜻이 숭고하니 지금까지 보존되는 것이다. 마치 제임스딘이 요절했기 때문에 많은 영화를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강렬했던 그의 연기가 영원히 영감을 주듯이 최용신 선생님의 열정 또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최용신 선생님이 샘터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감화시켜 보았자 사회적으로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비관적인 마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사회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거대한 변화를 이끄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종종 좌절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 큰 변화에도 작은 시작들이 있는 것이다. 한 명의 최용신은 큰 변화를 이끌지 못할 수 있어도 많은 최용신은 민족의 향로를 바꿀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용신 선생님의 움직임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일이라면 굳이 후손들이 추모할 필요는 없겠다. 타인을 위하고 사회를 위한 이타적인 정신 역시 본받아 마땅하다.


최용신 선생님은 1900년 초반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고학력자로서 일본과 영합하여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회가 변화하려면 근본인 농촌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샘터마을로 들어가신 것이다. 아마도 이 때 브나로드(v narod-‘민중 속으로라는 러시아어)운동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일단 쉽지 않다. 쉬운 길을 피하고 어렵지만 옳은 길을 택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농촌에서 열렬히 환영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고 비관적인 마음을 바꾸는 것은 진정한 교육자로 느끼는 고된 책무를 감당하였다.


어려운 길을 최용신 선생님은 걸었고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었다. <최용신 기념관>은 이를 표현 동상도 앞에 세워두고 최용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잘 보존하였다. 최용신 선생님이 전해준 감동이 3년의 짧은 시간동안 크게 다가갔다. 심지어 <최용신발물관>자체가 그의 제자였던 홍석필옹의 후원금으로 밑천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례만 보아도 그가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방문하였을 때 우연히 선생님 서거 84주기여서 여러 행사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께 직접 수업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특별주간을 통해 다시한번 선생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최용신 기념관>은 현재진행형이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엄을 매년 열고 있다. 아주 다양한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하고 있는데 이러한 학술활동을 통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연결해주고 있다. EH 카의 말마따나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더니 <최용신 기념관>100년전에 있었던 일과의 교호작용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가 갈 길을 되새겨준다. 나는 우리나라에 최용신 선생님 말고도 꽤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 좋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분들을 기리는 작업을 <최용신 기념관>처럼 꾸준히 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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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앙박물관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

Exhibition 2019. 1. 13. 20:59

미국대사관 쪽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안국역으로 움직이는데 뜻밖에 <불교중앙박물관>을 발견하였다. 오래 전부터 조계사가 있는 줄 알고 몇 번이나 가보았는데 그 옆에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작년 111일부터 올해 125일까지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라는 기획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입장료도 없고해서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박물관에 들어갔다.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는 기본적으로 경북지역에 있는 비문에 있는 것을 탁본뜬 것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이를 흔히 금석문이라고 한다. 금석문(金石文)이란 말 그대로 금속제나 돌에 적혀진 글이고 금석학은 이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번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는 석문을 중심으로 전시해놓았다. 석문은 우리의 과거를 알아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종이로 적은 글은 종이의 특성상 보관이 어렵기 때문에 오래전 기록의 경우에는 불타거나, 썩거나, 찢어지거나해서 복구가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목판의 경우에는 종이보다는 낫기는 하지만 이 역시 불타거나, 썩을 수 있다. 그런데 돌의 경우에는 파는 것이 매우 힘들어서 그렇지 한번 파면 아주 오랫동안 썩지도, 타지도, 찢어지지도 않는다. 물론 돌도 풍화가 되기는 하지만 데이터 보존이 아주 좋은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광개토 대왕비를 알 수 있듯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우리 선조들은 돌에다가 그 내용을 남겨 후세에 전하려 했다. 그리고 후세가 된 우리세대는 금석학을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아갈 수 있다.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포항 냉수리 신라비,’ ‘은해서 영파대사비,’ ‘영천호수 정세아 신도비,’ ‘부석사 원융국사비,’ ‘상주 충신의사단비,’ ‘선봉사 대각국사비,’ ‘불영사 사적비, 성주 명암 서학 유허비,’ ‘안동 퇴계 이황 묘갈,’ ‘경주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등을 전시했다. 전시회 이름을 경북의 역사를 두드리다라고 지은 이유는 아마도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다. 박물관에는 비문의 탁본을 어떻게 뜨는 지 과정을 보여주고 비디오 틀어주는데 기본적으로 물을 적시고 그 위에 정성스럽게 종이를 붙인 다음에 잉크를 바르는데 이 때 먹물을 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량의 먹을 특수 물질에 조심스럽게 묻혀서 손으로 콩콩콩 두드려서종이에 형상이 맺히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에게 노크를 하는 것이다.


돌에 새겨진 이유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 효자를 기리기 위해서, 나라에 충성한 사람을 위해서 등 다양하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내용보다도 글자의 유려함이었다. 돌에다가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컴퓨터에 아무렇게나 글을 쓰고 백스페이스 몇 번 눌러서 지우면 그만이지만 돌에다가 글을 적는 다는 것은 적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그리고 적는데 한자를 너무나도 잘 썼다. 물론 돌에다가 적은 사람은 당대의 프로 석공이겠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게다가 그 글자의 모습도 스타일이 모두 다르다.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명필을 보는 것도 상당한 즐거움이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미국의 영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가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전의 아주 오랫동안 불교의 영향을 우리 사회는 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이해해야한다. <불교중앙박물관>은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전국 금석문 조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아주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자료가 절에 남아 있고 탁본을 뜨는 노하우도 현재 절에 계신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기관이 협동해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앞으로도 밝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교중앙박물관>은 금석학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시설도 깨끗하고 좋아서 다른 전시회할 때 또다시 흔쾌히 방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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