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기념관>

Exhibition 2018. 12. 5. 17:11




서래마을에서 9호선을 타기 위해 내려가다가 우연히 <심산 김창숙 기념관>에 들리게 되었다. 반포에 꽤 오랫동안 살았던 나로서는 언제 이런 곳이 생겼는지 의아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은 물론 심산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지만 오로지 기념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서초구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건물에 1층에는 가장 중요한 심산선생님 기념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볍게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북카페가 있다. 지하에는 독서실과 서초창의허브가 있다. 그리고 2층에는 심산아트홀이 있어서 여러 공연을 관람하거나 직접 대관할 수도 있다. 3층에는 심산기념사업회 사무실과 교육실이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주민들과 호흡할 수 있게 기념관을 꾸려놓았다는 점이 좋았다. 간혹 위인의 전시관이라고 해서 너무 전시에만 몰두하다 보면 일반인들과의 괴리가 생기고는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덜 찾게 된다. 그와 달리 심산 기념관은 심산 선생님은 심산 선생님대로 기리고 생활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심산 선생님의 뜻을 실현했다고 본다. 만약에 여러 생활밀착형 시설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심산 선생님에 대해 덜 인지하였을 것이다.


1층에 구비된 심산 전시관은 연대별로 6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역1은 심산 선생님의 연보가 나와있고, 구역2 심산 선생님의 어렸을 시절이 나와있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웠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1879년생이신 선생님의 출생시기를 생각한다면 유학을 주류로서 배우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하다. 물론 지금도 유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글을 배우는 사람은 응당 알아야하는 것이 유학이었다. 선생님이 유학을 배우고 난 후 나라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유학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다. 구역 3에서 본격적으로 선생님이 구국운동을 나선 이야기가 나온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1910년 성명학교를 설립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신다. 이때가 선생님의 20대였을 시기였는데 나라가 빼앗기는 과정을 보는 것을 청년 김창숙을 좌시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구역 4에서는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가 억울하게 식민지배를 받았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셨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일본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분의 결기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식민지배를 끝내고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다. 구역 5에서는 광복 이후에 심산선생님의 활동을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를 비판하시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으로서 운영한다. 일평생을 나라를 위해서 고민하신 선생님은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시는데 그의 올곧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구역6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은 그렇게 크지는 않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음미하며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다. 구성이 연대별로 잘 되어 있어서 짧은 시간을 통해서 인간 김창숙의 걸어온 길을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실 초입에 영상실이 있다. 이 영상실에서는 심산 선생님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데 이것을 보고 보면 더욱 이해를 빨리 할 수 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많이 남기셨다. 그 중 마음에 걸리는 말씀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현재의 세대는 예전 세대보다 교육의 절대수준이 훨씬 높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알기만하고 그 배움을 바른 길로 옮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상당한 낭비이다. 심산 전시회를 통해 배운 것을 영감삼아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행동을 해보기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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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Book 2018. 10. 8. 03:17

독립운동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아마도 안중근, 유관순, 김구 선생님일 것이다. ‘김창숙이라는 이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이 책 <김창숙>을 보면서 유림의 대표주자로서 김창숙이라는 인물이 우리나라 독립 그리고 대한민국 발전에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알게 되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님은 1879년 경북 성주출신으로서 조선왕조 말기 때 태어났다. 그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행하게도 국권이 피탈되는 경험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점차 망해가고 있는 나라였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지 만은 않았다. 그 중 한 노력이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 운동이었다.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여 우리나라가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막으려 애를 쓰셨다. 불과 100여년이 지난 1979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 1800년대 말에 태어나신 분들의 고초가 얼마나 거대할 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국채운동이 벌어진 때는 선생님이 20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30대 때 일본과 공식적으로 지배를 당하고, 60살이 넘어서야 나라가 광복을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일평생을 나라가 망하고, 일본에게 지배당한 나라에서 사셨으니 그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해볼 계기를 가졌다. 김창숙 선생님은 수구적인 충군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송병준, 이용구 등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제기하고 있을 때 황제가 합방을 허가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우리 황제께서 나라를 팔아넘기는 역신의 말로 인해 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허가하더라도 이는 어지러운 명령이니 결코 따르지 않겠다.” 이에 대해 다시 황명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 아니겠냐는 물음에 그는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운데, 난명에 따르지 않음이 충이다(46).”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그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중요하다. 정권의 노예가 되어서 영혼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불법적인 일을 하라는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공무원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권보다는 대한민국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이 된 후의 사회에 대해서 유교 내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창숙 선생은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많은 유림들이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독립 후에 왕이 다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림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대단한 것은 반대로 불구하고 다른 유림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려는 노력과 끈기였다.

그리고 그의 오롯함으로 일본법정에서도 나타난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는데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변호를 거부함은 대의가 매우 엄하다. 나는 대한 사람이고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룰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하면 그 대의에 모순됨이 어떻겠는가...나는 포로이다. 포로이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함은 치욕이다. 실로 내 지조를 바꾸어서 타인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96~97).”

선생님의 일관성있는 논리와 절개에 나는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 독립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선 것이다. 정말 숭고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다행히 살아 생전에 광복을 맞으셨다. 그리고 광복 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신탁반대운동부터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싸우기까지 노인이 된 후였지만 고군분투하셨다. 선생님께는 19625월에 84세로 돌아가셨다. 1960년에 4.19혁명 그리고 19615.16 군사정변이 있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나라의 희망을 보았지만 또한 그것이 좌절되는 것까지 보시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 상상해보건데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격변의 현대사를 몸소 겪고 그 역사를 만드시면서 많은 일을 하셨다. 더 많은 김창숙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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