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박물관>

Exhibition 2019. 1. 27. 23:45

김중업 선생님은 우리나라 현대 건축계의 한 획을 그린 분이다.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로서 주로 김수근 건축가와 많이 비교되고는 한다. 나는 건축가야 말로 현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예술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난해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이해를 구하는 현대미술가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는 건축가야 말로 예술사적인 위치를 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건축가 중에는 김중업 선생이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안양시에 그가 지었던 주식회사 우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김중업박물관>이 있다.


1922년에 태어나 1988년에 돌아가신 김중업 건축가는 그 당시로서는 쉽지 않게 국제적인 삶을 살았다. 프랑스에 가서 건축거장 르 크르뷔지에(Le Corbusier)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금도 디자인 스쿨 중에 탑인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ng)에서 교수직을 역임한다. 지금도 되기 어려운 RISD 교수를 70년대에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대단하다. 1970년대는 미국에는 인종적인 차별이 크게 남아 있었던 시절이고 아무리 뉴잉글랜드 지역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디자인 스쿨이라지만 동양인을 강단에 세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렇다고 그가 그 당시 시절의 교육 상황(그의 유년과 청소년기 때는 우리나라는 일본치하에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그가 엄청나게 영어를 잘 했을 것 같지 않다. 이 모든 악조건을 제쳐두고 그 정도 위치에 섰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인정을 받았던 것이 아닌 가 싶다. 이런 것을 보면 참으로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경력 중에 특이한 점은 그가 고국에 강제로 들어오지 못하고 프랑스에 있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970년 준공한지 3개월 만에 부서진 와우아파트에 관련하여 정부를 비판을 했다. 이에 정권의 눈총을 받고 프랑스에 망명하게 된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들어오지 못하다가 박대통령이 죽은 후에야 모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에는 그런 시절이었다. 정권을 비판한 대가는 혹독했다. 모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내에 있는 재산도 크게 악영향을 받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가 이러한 아픔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의 입지를 구축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올림픽 공원의 평화의 문이라든지 프랑스 대사관 관저, 서강대학교 본관 등등 여러 건물들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김중업박물관>은 위의 2가지 이야기 외에도 다양한 그의 이야기를 전시해두었다. 주제가 전시인만큼 말보다는 직접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이 많은 데 그가 만든 많은 건축물들도 잘 전시가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느낀 박물관에 대한 느낌은 잘 관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층마다 관리해주는 분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좋은 전시물이 있는 박물관이지만 여러 이유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김중업 박물관>은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이 현재 진행형으로 잘 관리되어 있어서 보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았다.


건축가는 건축으로서 이름을 남긴다. 이제 김중업 선생께서 돌어가신지 이제 30년이 넘었는데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나같이 건축에는 문외한인 사람도 알게되는 까닭은 그가 남긴 많은 건축물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흘러 수천년이 지난 후에는 어쩌면 건축물들이 없어짐에따라 그의 이름은 점점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남긴 건축물은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물리적으로는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교과서나 역사책에 남아서 누군가에 의해서 기억되지 않을 까한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참으로 잘 살았다고 평가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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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Book 2017. 11. 6. 00:47



나는 건축가들을 좋아한다. 변변찮은 노력으로 공감을 사지 못하는 몇몇의 포스트 모더니즘 화가보다 실제로 인간의 공간을 아름답고 특색있게 가꾸는 건축가들을 훨씬 더 좋아한다. 세상에는 많은 탁월한 건축가들이 있다. 그 중 한명이 안도 다다오이다.

 

노출형 콘크리트형 건물들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눈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노출형 콘트리트형 건축스타일을 확립한 안도 다다오는 그만의 철학을 끈덕지게 밀어붙여서 하나의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그의 길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무학에 가까운 이 사람이 학벌이 우리나라만큼이나 중요한 일본에서 살아남는 과정은 그 자체가 그의 건물만큼이나 숭고하다.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서는 그가 어떻게 권투선수에서 건축가로 경력을 전환했는지, 그리고 건축가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그의 기억과 생각이 적혀있다.

 

책에서 줄곧 나오는 그의 생각은 배울 만하다. 예를 들면, “남한테 기대거나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하는 태도는 허용할 수 없다(p.25).” “권투라는 스포츠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격투기이다(p.46).” “전에 없는 악조건이라는 점이 젊은 나를 오히려 자극시켰다(p.86).” “긴장감 있는 시간을 끝까지 견뎌 낼 수 있는 끈기와 체력이 필요했다(p.136).” “일감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p.217).” “건축가라면 자기가 관여한 건축이 서있는 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p.234).” “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도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 남아서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p.419).” 어쩌면 당연한 것 같지만 안도 다다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문구는 나를 자극시켰다.

 

물론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여서 더 멋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도 다다오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성공했을 것 같다. 세상의 운도 중요하지만, 운을 자기편으로 만들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그리고 끈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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